베르디의 <나부코> 中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by 이태옥 posted Dec 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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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Verdi 쥬세페 베르디(1813~1901)

 

한때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베르디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오페라 <나부코>부터였다.

베르디는 첫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로 호평을 받고,
다음 작품 <왕국의 하루>를 작곡할 무렵 부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었다.

낙담한 베르디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인 메렐리는 재능 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작곡의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했다.

메렐리는 <나부코>의 대본을 마련하여 베르디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 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 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Chorus of the Hebrew Slaves
from Opera "Nabuco" Act.3


베르디 / 오페라 나부코 中 3막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901]

 

금빛날개를 타고 날아가라, 내 상념이여
가거라,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향기에 찬 조국의
비탈과 언덕으로 날아가 쉬어라!
요르단의 큰 강둑과 시온의
무너진 탑들에 참배를 하라...
오, 사랑하는 빼앗긴 조국이여!
오, 절망에 찬 소중한 추억이여!

예언자의 금빛 하프여,
그대는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우리 가슴속의 기억에 다시 불을 붙이고,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해다오.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 부르자.
참을 힘을 주는 노래로
너에게 용기를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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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인 론코레의 여관집 아들로 1813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집은 가난하고 옹가와 가까웠기 때문에, 농민으로서의 소박한 기질이
그의 일생을좌우하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였고,
마을에서의 바이올린 소리와 교회의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끌리어, 7세때에
교회에서 미사반주를 하여 그의음악적인 소질을 인정받았다.

그뒤로는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였고, 10세때에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는 한편,근처에 있는 마을의 학교에서 2년간 음악공부를 하였다.

15세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고,
18세때에는 그의 스승 바레찌의 원조로 밀라노로 갔다.

시골출신인 그의 입학자격 연령인 14세를 넘었기 때문에 입학할 수 없게되어,
한때 실망하였지만, 리비나에게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1836년 은사 바레찌의 달 마르게리라와 결혼하고 밀라노에 정주하였다.
1839년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키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써서 스칼라좌에서
발표하였는데 대단한 성공은 아니었다.

다음 해에 <왕국의 하루>를 작곡하였는
데, 이때에는 그의 부인과 두 아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대문에 불행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 실망이 컸기때문에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었지만, 친구들의 격려로 힘을 얻어 오페라 <나부꼬>를 작곡하여, 마침내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뒤부터 차츰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룸바르디,>,<에르나니>등의 애국적인
작품을 4년간 계속하여 4편이나 작곡하였다.

1847년에는 <마크베르>를 발표하여
새로운 음악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후 영국에가서 <군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한편 <리골렛토>,<일트로바토레레>,<라트라비아타>,<아이다>등으로 온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60세가 넘은 후에는
바그너의 관현악법을 연구하여 일대 전환을 하였다.

전 4막으로 구성되는 오페라 나부꼬는 성서에 나오는 영웅 바빌론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야기를 솔로라가 각색한 것으로,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아내의 사망과 오페라 《하루만의 왕》의 실패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던 베르디가,
뒤에 결혼하게 되는 조세피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밀레리의
격려속에 작곡한 이 오페라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3막에 나오는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으로 오늘날 더욱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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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코(Nabuco) 제3막 2장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Chorus of the Hebrew slaves

(바빌로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바빌론에 끌려와 노예생활을 하는 히브리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으로 '이탈리아 제2의 국가'로도 알려져있는 유명한 곡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환기를 연 동시에 낭만파 오페라의 정점을
확립한 이탈리아의 희망이자 명예였던 베르디의 음악은 탄식과 단념의 목소리인
벨리니의 노래에 익숙해진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베르디의 세번째 오페라이자 첫 성공작인 ‘나부코’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다른 어떤 오페라 보다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특히 그의 밀라노 라 스칼라 입성에서 첫 대성공을 거둔 오페라 '나부코'중에 나오는 '노예들의 합창'은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밑에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감동을 줌과 동시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오랜 분열과 오스트리아의 압제에서 벗어나 통일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조국애를 일깨우고 강한 활력을 불어 넣었다.

나부코 왕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베르디의 대작 오페라'나부코'는
유태인들의 시련과 신앙의 승리를 기본 줄거리로 하면서 사랑과 결투, 복수,
권력에 대한 야심, 회개, 용서 등 극적인 내용을 두루 담고 있다.

'나부코'초연 이후 베르디는 밀라노시 전체의 주인공이 되었다.
베르디의 모자, 넥타이가 장안의 유행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의 가사는 작곡가 베르디를 침체에서 일으켜 세운 구절이다.
베르디는 첫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로 호평을 받고,
다음 작품을 작곡할 무렵 부인과 아들의 잇달은 죽음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초연이 실패하자 낙담한 베르디는 붓을 팽개치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인 메렐리는 재능 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막연한 위로 대신 먼저 작곡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하는 일이 급했다.
메렐리는 완벽한 ‘나부코’의 대본을 마련하여 베르디의 집,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다.

베르디는 어느 날 낯선 대본을 펼쳐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서 열왕기 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빌로니아 왕국의 통치자 나부코왕(성서상의 이름은 느브갓네살)이
유대민족을 침략하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이야기였다.
(구약 성서 예레미야, 열왕기 하, 다니엘서에는 바벨론왕 나부코의 사적에 관해 씌어 있다.
나부코 도노조르왕은 BC 605년부터 BC 562년까지 통치하면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격파해 하무라비왕 이래 대군주로 칭송을 받았으나
만년에 폭정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 병에 걸려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혔던 히브리인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이 노래를 부르며 시온을 그리는 마음을 달랬다.
“가라, 내 마음이여,금빛 날개를 타고” 예루살렘에 돌아가기를 애절하게 갈망하는 합창이었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슬픔에 빠졌던 베르디에게 그야말로 금빛 날개를 달아준 것이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로 시작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었다.
절망에서 희망의 등불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메렐리의 격려 속에서 ‘나부코’는 합창곡뿐만 아니라 힘찬 오페라로 완성되어 청중의 환호를 받았다.
특히 극중의 합창들이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줬다.
독립과 통일을 바란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포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처럼 불렀다고 한다.

1842년 이 작품이 초연될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작품 속 줄거리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국민의 애국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특히 3막 2장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당시 이탈리아 국민의 ‘해방가’가 됐고,
베르디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가 불렸을 정도다.
그 때문인지 이날 저녁 공연 때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끝난 후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는 그칠줄을 몰랐고 이에 화답하듯 이 노래는 그 자리에서 ‘앙코르’로 다시 연주되기도 했다.

베르디는 애국심 고취와 독립운동에 불붙이는 작품을 많이 써서 국민들의 공감을 계속 얻었다.
오페라 합창의 최고라 부르고 있는 이 '노예들의 합창'에 대해 롯시니는 합창곡이라고 하기 보다
그것은 바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를 위한 대 아리아'라고 놀라운 탁견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그때까지 합창이 극적으로 이것만치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 합창의 역할이란 장면을 바꾸거나 장식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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