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데드마스크(1827년 제작)
죽음아,
올 테면 오너라.
용감하게 맞아주마.
- 베토벤
유서는 통상의 일기나 편지나 에세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단어나 문장을 쓰더라도 절박하다. 마지막 몇 마디이기 때문에 '안녕!'이라고만 해도, 그것을 남긴 자의 주위의 사람들은 수만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서는 마지막 말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머물렀던 하일리겐슈타트 저택 한창 나이에 귀를 먹어버린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 숲에서, 절망적인 공포에 휩싸인 채 동생 칼과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흔히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고 불리는 편지다. 1802년 무렵에 요양을 가서 썼으니까, 그는 이 절망적인 편지를 쓰고 나서도 25년 가량을 더 살았고, 그것은 베토벤 개인에게나 인류 전체를 위해서나 너무나 감격적인 회생이었다.
그는 청각을 서서히 상실해가던 무렵에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작곡하였고 완전히 그 능력을 잃어 극심한 고통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1818년 이후에도 몇 해를 더 살아서 <장엄미사>, <9번 교향곡 합창>, <후기 현악 4중주곡집>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서양 근세사 300여 년의 그 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지극한 '불멸성'의 경지에 올라 있다. 특히 <9번 교향곡 합창>은 1798년에 스케치를 시작하여 20여 년이 흐른 1823년 말 경에 완성을 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베토벤이 서서히 청력을 잃기 시작하였다가 완전히 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차단 당하게 되는 시기에 거의 일치한다.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숲 속에 앉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전조를 느끼면서 '유서'를 썼던 것이다. 그는 바흐나 하이든, 모차르트 같은 바로 윗세대 작곡가와는 달리 인류 사상 최초로 자유로운 시민 사회의 열기 속에서, 오직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인류를 위하여 작곡을 한 사람인데,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그 불멸성이 얼마나 컴컴한 동굴 속에서 지펴진 불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쓴다.
"나의 청각은 한때는 극도로 완벽해서 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오, 그럴 수 없어. 그러므로 내가 그대들과 기꺼이 어울려야 할 때 내가 움츠려 드는 것을 보면 나를 용서해다오. 나의 불행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수 밖에 없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더 크나큰 고통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할 수가 없고 세련된 대화도 상호간에 의견의 교환도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난 버려진 사람처럼 거의 혼자 살아야만 한다. 난 어쩔 수 없이 필요할 때에만 사회와 어울릴 수 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접근 할 때면 심한 공포감이 나를 엄습하고 내 상황을 상대방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진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산책하는 베토벤 유서에 드러난 바와 같이, 베토벤의 개인적 일생은 비참한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음악사적 운명은 '근대 시민 사회'라는 행복한 시절과 조우한 것이었다. 런던으로 가는 여행 길에서 잠시 본에 머물면서 베토벤의 초기 악보를 지적해 주었던 하이든, 1787년에 베토벤의 연주를 들어주었던 모차르트. 이런 윗세대의 음악적 업적이 베토벤의 혈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베토벤은 또한 지휘를 작곡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최초의 지휘자였다. 그것은 자기 작품은 자기가 해석하고 지휘해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제1바이올린 주자와 건반 주자들이 지휘를 담당했던 시기에 지휘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운 사람이 베토벤이었다. 그의 지휘는 희극적인 비극이었다. 귀머거리이자 고집불통인 베토벤의 지휘는 내면적 고통에 몸부림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불구의 거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원들은 베토벤 대신 제 1바이올린 주자를 봐야만 했다.
아래 영상은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얼마 전에 끝난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장근석이 연기한 젊은 지휘자 강건우가 강마에(김명민 역)에게 대들면서 '저는 클라이버 같은 지휘가 좋다구요!' 했었는데, 그리고 임시로 장만한 비닐하우스 연습장 전면에 이 지휘자의 대형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었는데, 아래 영상을 보면 왜 그런 대사와 장치를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정말 '홍자매'의 대본은 디테일이 살아 있다. 아래 영상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연주를 한다.
다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한 대목을 옮겨 본다.
"누군가가 목동이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나는 역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때의 그 굴욕감이란! 그런 일들은 나를 거의 절망으로 빠뜨려 버린다. 그런 일들이 조금만 더 일어났으면 난 자살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를 지켜준 것은 오직 나의 예술이었다. 아, 난 내 안에 느끼는 것을 모두 꺼내놓을 때까지는 세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 비참한 삶을 견디어 왔다. 이토록 민감한 몸에게는 진정 비참한 삶이다. 몸이란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가장 좋은 조건에서 가장 나쁜 조건으로 내던질 수도 있다."
베토벤은 근대 시민 사회에 조응하는 '숙성된 소나타 양식'을 완성해냈다. 이 양식은 정교하고 완벽한 건축적 구성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음악가(작곡가와 연주가)가 무한한 미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지평이 되어주었다. 베토벤의 개인 생애와 겹쳐지는 이 고전과 낭만의 시대에 많은 음악들이 '소나타'라는 옷을 입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3번 교향곡 영웅' 악보 그 양식은, 곧 베토벤의 음악은,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의 시대를, 사상적으로는 정치적 계몽주의와 팽창하는 민족주의와 겹쳐진다. <3번교향곡 영웅>에 관한 창작 과정의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베토벤은 진실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를 지지했고, 근대를 향한 그의 정치적 결단을 성원하였다.
단순히 '흠모'하여 음악을 헌정하려던 게 아니라 정치철학의 동지적 연대감의 표현으로 그것을 작곡하려고 했었다. 물론 초기의 공화주의자 나폴레옹이 시민혁명의 '보혈' 위에 올라앉아 황제가 되고 다른 이유로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고가게 되면서 베토벤은 그를 멀리했다.
베토벤 시대가 저물고 난 뒤 유럽은 팽창하는 민족주의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칸트나 횔덜린 같은 프랑스 시민 혁명 지지자들의 사상은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피히테, 아른트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민족 정체성에 대한 낭만적인 열강을 하였다. 민족을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이자 인격체로 보는 이론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런 민족 감정의 열렬한 대변처럼 확산되었다. 그 먼 훗날의 장송곡이 히틀러 파시즘임은 역사가 말해준다.
20세기 초에 설치된 베토벤 기념상 하지만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 '신이시여, 당신은 나의 가장 깊은 곳의 영혼을 보시며 당신은 그 안에 인류에 대한 사랑과 선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있음을 아시나이다' 하고 썻듯이 지독한 고통의 밑바닥에서 건져올리는 진실한 구원의 노래를 간구하였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하게 불행을 겪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받게 하라'고 썼는데, 이 유서의 한 대목은, 그의 청력을 잃은 이후 그가 남긴 걸작들이 '고난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라는 베토벤 음악의 근대성을 증명해준다.
<9번 교향곡 합창>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부 교회에서 그 유명한 멜로디에 '영화로운 조물주의 오묘하신......'라는 '개사곡' 찬송가를 불렀고 이것이 오래 전의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나 원곡에 그런 가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시를 4악장에 옮기면서 베토벤은, '죽음아, 올 테면 오너라, 용감하게 그대를 맞아주마'라고 유서에 썼던 바와 같이, 그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민이 하나되는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였다.
만년의 베토벤 초상화
바로 그 베토벤이 1770년 12월 17일에 독일 본에서 태어났다. 우연히도 1939년의 같은 날 12월 17일에 시인 정현종도 태어났는데 그는 시집 <견딜 수 없네>에 수록된 시에서 베토벤을 '불끈 / 솟는 / 일어서는 / 한 거인과 / 많은 거인들!' 이라고 쓴 적 있다.
아래 영상은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해석에 일가를 이룬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가 뉴필하모니아 오스케스트라를 이끌고 1964년 11월 8일에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4악장의 마지막 대목이다. 영상의 길이는 9분 쯤 되는데, 절반 가량이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소리다. 연주를 다 마친 오토 클렘페러가 몇 번이고 지팡이를 짚고 그 앙코르 소리에 화답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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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베토벤의 데드마스크가 않보여, 어쩌지? 보고싶은데.
절망적인 상태에서 유서까지 써놓고도 불후의 대작을 작곡하고 지휘까지 할수있었던
베토벤!! 역시 위대한 작곡가임을 새삼느끼는구나. 이렇게 좋은 음악을 나에게
들려줄수있는 너의 능력이 부러울뿐이다. 고마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구나.
댓글쓰고 열었더니 데드마스크가 보인다. 신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