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뭔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비범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유명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의외로 평범하고 소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신영옥이 그런 사람이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을 문영기의 독(獨)한 인터뷰에서 만났다.
◈투혼으로 마친 예술의 전당 재개관공연
지난 2007년 12월 12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오페라 공연 도중 발생한 화재로 큰 피해가 났고, 1년 넘는 공사 끝에 지난 3월 재개관 공연이 열렸다. 재개관 공연인만큼 작품과 출연진 선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공연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주인공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이다. 이 정도면 재개관 공연으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개관 첫날, 첫 공연에서 또 사고가 일어났다. 프리마돈나 신영옥의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공연 막바지에 피가로와 서로 때리면서 장난치는 장면이 있는데, 첫 공연이다 보니 너무 열성적으로 몰입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상황에서 지휘자를 보고 있었는데, 돌아서는 순간 카오두로가 휘두른 팔을 미처 보지 못하고, 팔꿈치에 강하게 맞았다.” 비명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아픈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커튼콜까지 무사히 마치고, 다음날에야 병원으로 달려갔다.
예술의전당 입장에서는 정말 불행의 연속이다. 공연이 계속될 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영옥은 손에 깁스를 한 채 사흘의 공연을 모두 마쳤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바로 다음날 낮 공연이 잡혀 있었어요. 할 수 없이 부분 마취하고, 수술을 했죠. 공연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모든 걸 왼손으로 하는 연습을 했어요. 기타도 왼손으로 치고….”
그녀의 투혼 덕분이었는지 다행히 ‘피가로의 결혼’은 객석 점유율이 모두 90%에 육박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 루치아, 가장 힘들지만, 가장 애정이 가는 배역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제 3막. 흰옷을 입은 루치아가 피를 묻힌 채 무대로 뛰어든다. 정신을 놓은 그녀는 남편을 칼로 살해했다. 서서히 미쳐가는 루치아. 아리아가 이어진다.
가장 유명한 아리아 가운데 하나인 ‘광란의 아리아’는 무려 15분간 계속된다. 노래실력은 말할 것 없고,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화하기 힘든 배역이다. 가장 유명한 루치아는 마리아 칼라스다. 드라마틱한 인생만큼 극적인 음색을 가진 칼라스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역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칼라스에 필적할 만한 ‘루치아’는 바로 신영옥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 배역만 맡으면 몸이 아프다.
“캐릭터에 몰입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잠도 잘 못이루게 되고, 그 배역에 묻혀 있는 것 같다. 꿈에도 나타나고. 어떤 지인은 신영옥이 이 역할 맡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
그녀는 심지어 이 역할 때문에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루치아라는 역할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그만큼 진하다는 의미도 되겠다.
◈ 무대 위의 인생, 그리고 어머니
그녀가 무대에 데뷔한 것은 4살 때의 일이다. 목소리가 큰 것을 알아본 어머니의 선견지명 덕분에 KBS 어린이 합창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발탁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온 세계를 무대로 공연을 다녔다. 특히 무용에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무용과 성악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노래를 선택했고.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했다.
79년뉴욕에 혼자 내려선 그녀는 그렇게 30년 동안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에 나섰다. 한국인으로서 무대 위의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으랴.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3녀 중 막내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그녀는 부모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다르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가장 큰 지원군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닷새가 지나 알았다.
“토론토에서 리골레토를 하고 있었던 같다. 거의 매일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가족들이 엄마가 성경모임에 가셨다고 둘러대면서 바꿔주지를 않았다. 예감이 이상했다.그런데 형부에게 팩스 한통이 날아왔다. 어머니가 간암 말기라는 거였다."
한국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데 전화가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들어올 생각마라. 들어와도 얼굴보지 않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바쁜 공연일정 때문에 다른 나라로 날아 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못본 것 같은데 어떻게 된거야?” 이런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어디 있을까? 그녀는 어머니의 임종을 먼 친척에게 전해들었다. 임종은커녕 장례식도 보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공연을 망칠까 그녀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녀를 걱정하셨다.
신영옥씨는 아직도 여행가방에 어머니의 내복과 낡은 옷가지들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 어머니의 묘소를 찾을 때면 낡은 어머니의 점퍼를 입고 간다. 구태여 말이 필요 없는 애절한 그리움이다.
◈ 조수미, 홍혜경과의 인연
한국 출신 가운데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소프라노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신영옥과 조수미, 홍혜경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그녀와 홍혜경과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신영옥이 줄리어드를 졸업하고, 미국무대에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홍혜경은 이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였다.
리골레토 공연 도중 몸이 아픈 홍혜경이 도저히 무대를 계속 이끌수 없게 되자, 대타로 나선 것이 바로 신영옥이었고, 이 무대를 계기로 그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의 주역으로 일어서게 된다.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조수미는 그녀보다 메트 무대의 데뷔가 1년 빨랐다. 그리고 유난히 조수미와 더블캐스팅 된 배역이 많았다.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조수미와의 인연은 유난히 많은 편이다.
세 명의 명성이 높은 만큼 라이벌 의식도 남다르지 않을까?
“그건 음악계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셋은 완전히 영역이 다르다. 홍혜경 씨는 리릭 소프라노, 조수미씨는 콜로라투라, 저는 라이트하면서 콜로라투라를 겸한 목소리다. 겹치는 역할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맞는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에 신경 쓸 문제도 아니다.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낄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 스트레스 해소는 김치찌개로
그녀는 노래 외에 특별한 취미가 없다. 아직 미혼이니 가족도 없다. 그저 집안 꾸미는인테리어가 취미의 전부다. 술도 전혀 하지 못하고,커피도 냄새만 맡는다. 친구들과 어울려도 목을 보호하느라 오랫동안 수다를 떨 수도 없다.
그녀는 사실 ‘까칠’하기로 유명하다. 남들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편이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몇 번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 연습한다. 발음 하나까지 신경 쓸 정도로 그녀는 완벽주의자다. ‘마니따’를 ‘마리다’로 했다면, 화장실이고, 벽이고 가리지 않고 메모를 붙여놓고 계속 그 발음을 되뇌인다.
새벽에도 생각이 나면 다시 일어나 앉아 연습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 지금은 훨씬 너그러워 졌지만,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그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가장 편한 옷 입고, 머리 질끈 동여매고,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를 먹는 일이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온 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행복감에 젖어든다고 했다. 비범한 그녀가 택한 의외로 평범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 데뷔 20년 특별한 무대
트로트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도 이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황성옛터, 유정천리 같은 노래가 점점 듣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추억을 되새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말도 될 것이다.
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그 노래가 이제 점점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가 부르는 “사공의 뱃노래는.. ” 아직 잘 연상되지 않는 장면이다.
그녀가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지 20년이 된다. 그녀는 특별한 무대를 생각하고 있다. 올해 신년음악회에서 그녀는장구를 들고 나왔다. 실로 몇 십년에 잡아본 장구채였다. 20년 기념무대에서 그녀는 합창단원 시절 익혔던 북춤과 장구춤, 한국무용까지 선보일 생각도 갖고 있다.
이곳 저곳에서 교수직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아직 교수직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의 모습도 여전히 아름답다. 단 한 사람의 팬이 그녀의 노래를 기대한다면, 그녀는 언제고 무대에 오를 준비가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