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마지막 숨결, 오베르 (글쓴이 : 김혁)
파리 생 나자르역이나 북역에서 퐁투와즈 방향으로 40여 분 내려가다보면,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와즈 강을 가로질러 서 있는 인상파의 좋은 소재가 될 듯한 아담한 철교와 만나게 된다. 이 곳에서 강을 따라 철길이 함께 나 있는 한적한 도로를 10여 분 따라 올라가면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화가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세잔느가 이 곳에 도착한 것은 고흐가 도착한 1890년보다 18년 앞선 1972년이었다. 그는 18개월 동안 여기에 머무르면서 거리와 나무, 집들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이 곳 오베르에서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피사로와 뒷날 고흐의 주치의가 되었던 의사 가셰와의 예술적 교류를 통해 세잔느만의 독특한 밝은 색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는 이 곳에서 그린 〈의사 가셰의 집〉과 〈팡뒤의 집〉 등이 소장되어 있다. 고흐가 정신병원을 거쳐 동생 테오가 소개해준 의사 가셰를 만나기 위해 오베르에 도착한 날은 1890년 5월 20일이었다. 그날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난 7월 29일까지 약 70일 동안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70일 고흐의 예술혼이 살아 있는 곳
고흐의 이 글 속에는 그가 마치 남프랑스에서 미스트랄과 더불어 발견한 모든 자연의 색들을 다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고흐는 도비니의 정원을 그리게 되었고, 지금 이 그림은 배경이었던 정원 앞에 고흐의 자취를 찾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놓여 있다. 도비니의 정원을 지나 중심가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흰색의 시청 건물이 있다. 고흐는 이 건물과 주변을 화려한 색조와 질서있는 대칭으로 그렸다. 지금의 건물 모습은 1890년대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다만 굵어진 나무와 마차 대신 시청 앞을 메운 자동차들만 1백 년의 시간을 느끼게 할 뿐….
고흐는 햇볕이 많았던 5월부터 7월까지 오베르의 들판과 마을을 그리기 위해 매일 이른 아침 그림 도구를 챙겨들고 이 방을 빠져 나갔디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몹시 지친 상태로 돌아와 낮 동안 자신이 본 색깔과 습작한 내용을 자세히 쓴 편지를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 긴 편지는 흔히 그가 테오로부터 받은 50프랑 지폐에 대한 고마움으로 시작됐고, 다음으로 동생 가족의 건강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필요한 그림 물감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 형제가 남긴 편지는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가 어떻게 탄생되는가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또한 사후 이 편지들을 기초로 씌어진 전기는 고흐의 인간적 모습을 보다 잘 나타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고흐의 작은 방을 빠져 나오면 바로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데, 바르비종파이면서 오베르에서도 작품활동을 했던 도비니의 박물관과 오베르에 남겨진 고흐의 자료를 모아둔 사무실이 있다. 그 오른편으로 좁은 골목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고흐의 〈오베르의 계단〉의 실제무대이다. 두 명의 젊은 여인과 다른 두 명의 부인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구부정한 신사가 있다. 이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어느 중점을 향하고 있는데 흘러 들어가는 구도와 계단 주변을 오베르에서 발견한 수수한 색채들로 잘 표현해 놓고 있다. 고흐의 최후를 고한 까마귀와 누런 보리밭고흐는 신경과 의사며 그의 주치의였던 가셰를 만나기 위해 일 주일에 두세 번 그림에 나타난 계단 밑에서 왼쪽 언덕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빅토르 위고와 의사 가셰의 길'로 명명되어 가셰의 집앞까지 통과한다. 가셰의 집은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철 대문 사이로 보이는 몇 개의 계단을 오르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가셰와 고흐의 관계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고흐는 편지에서 가셰가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무척 좋아한다고 쓰고 있다. 가셰는 고흐의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주 식사초대를 했다고 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또다른 편지에서 그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즐겁다고 쓰고 있다. 특히 복숭아 빛깔로 장식된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가셰의 딸 초상화를 짙은 초록과 황록으로 장식한 길쭉한 보리 두 점과 대조시킴으로써, 자신이 발견한 색채와 대상과의 단계를 보여주고 싶다고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 그린 또 다른 그림, 두 권의 의학책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고 있는 가셰의 초상은 가셰 자신도 무척 좋아했을 뿐 아니라 뉴욕 경매사상 가장 비싼 가격인 8천2백50만불에 팔려나갔다. 가셰는 개인적으로 세잔느와 피사로의 친구였으며, 테오는 피사로를 통해 가셰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는 가셰의 컬렉션을 모은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세잔느와 피사로, 시슬리, 기요민, 르느와르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의사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고흐는 분명 그가 그렸던 오베르의 그 계단들을 올라 지금 '도비니의 길'로 명명된 길을 따라 산책했을 것이다. 그는 이 길 끝에 위치한 작은 시골 교회의 아담한 모습을, 늘어진 둥근 지붕의 선들과 유머러스한 붉은색 지붕 위로 약간 솟아 오른 시계탑으로 나타냈다. 교회 앞으로 나 있는 두 개의 대칭적인 길들과 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한 여인의 뒷모습, 그리고 짙은 청색으로 장식된 하늘로 주변을 장식했다. 지금도 이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고흐의 작품 속 교회에서 느끼는 감흥의 정도는 실제 교회 모습에서 느끼는 그것에 비해 훨씬 본질적인모습에 다가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예술을 위해 몸바친 고흐 형제의 넋이 담긴 곳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계곡 밑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오베르의 성 뒤편 공원에 이르렀다. 아를르에서 자신의 귀를 잘라 상자에 넣어 한 창녀에게 보냈던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냈다. 가슴에 심한 총상을 입은 그는 상처 부위를 움켜지고 의사 가셰의 집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집 주인조차도 그가 돌아온 것을 몰랐으며, 저녁 식사 후에 이 사실을 안 주인은 가셰를 부르고 급히 테오에게 전보를 쳤다. 수술을 위해서는 병원이 있던 퐁투와즈까지 가야 했지만 당시 도로 사정으로는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고흐는 그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고흐는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조그만 방에서 급히 달려 온 테오와 짧고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 29일 새벽 이틀 간의 고통을 뒤로 하고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자연의 온갖 색들로 가득찬 그림들로 메워진 조그만 방에서 고흐 형제가 나누었던 마지막 밤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많은 상상력을 갖고 생각해 볼 수 있다. 37세의 나이로 오직 그림만을 그리다간 한 예술가와 평생 그의 뒷바라지를 했던 동생. 그들이 네덜란드에서 함께 보낸 어린 시절과 계획했던 예술 공동체에 관한 여러 일들. 모든 것들을 중단한 채 예술가인 형의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던 동생의 마음. 결국 6개월 남짓 지난 1891년 1월 11일 테오도 죽은 형의 예술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도 전에 정신 질환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형제는 지금 고흐가 마지막 그렸던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 옆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오베르 교회와 공동묘지 사이 풍경은 고흐의 작품 〈비〉의 배경인데, 무덤으로 향하는 길 옆에 세워진 이 그림의 모습을 접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보낸 시간 동안 쾌적한 마을 거리들과 이엉을 얹은 오두막집, 황금물결치는 넓은 보리밭의 풍경과 아름다운 정원들 그리고 자살한 곳에 놓여 있는 자신의 마지막 초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상과 사물에 좀더 정직하게 다가가려 했던 고흐의 예술 세계는 예술적 사고의 터널을 통해, 인간과 물질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마주 대하는 예술적 자세를 갖게 했다. 이로써 당시의 예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대가들의 표현을 낳은 것이다. 고흐는 이 대가로 불행한 짧은 생을 보냈으며 지금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행복을 얻고 있다. 건강한 자연주의적 본능을 지닌 빈센트 반 고흐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우리 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정신적 자세의 가장 가치있는 영역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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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9 13:41
반 고흐의 마지막 숨결, 오베르 / " Vincent " - Song by Don M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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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불문학을 했답시고 마지막 결산을 한다며
지난 겨울 파리를 들렀는데 글을 못썼습니다.
돌아와 아들집에서 쓸려니 두살반 짜리 손녀가 놀자며
가만 놓아두질 않았습니다. 할비 할비 하며.
30여권의 책을 찿아 읽고 마음먹고 떠난여행 이었는데...
위에 올려주신 글 읽고 저는 또 남불로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