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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freecolumn.co.kr

알테 리베(Alte Liebe)

2011.08.12


요즘 TV나 신문을 보면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 7080', '그땐 그랬지' 같은 복고조 프로그램이나 기사가 많습니다. 변화무쌍하고 삭막한 일상에 지쳐 정서적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는 탓이겠죠. 한 템포 쉬어가며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옛 일을 떠올리는 여유도 가끔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 한 번 1970년 대 초반의 충무로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죠.

그 무렵 충무로엔 유독 전파상과 악기점들이 많았어요. 난 전파상들이 줄줄이 늘어선 그 거리를 걸으며 가게 안에 놓인 전자제품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답니다. 그러면 마음에만 두고 흠모해 마지않던 사람이 글쎄 예열이 필요 없는 순간 수상의 3D LED TV 화면에서처럼 불쑥 뛰쳐나와 화들짝 놀라곤 했다니까요. 무슨 마술을 보는 것 같았죠. 아니, 그땐 조잡한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밖에 없었다고요? 하긴 그렇군요.

충무로의 대표주자로는 무어니 해도 음악감상실 '필하모니'를 꼽을 수 있어요. 필하모니는 종로1가의 '르네상스', 광교의 '아폴로'와 함께 클래식 동호인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가난한 선남선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죠. 음료수 한 잔 시켜 놓은 채 어두컴컴한 곳에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작업'을 거는 것이에요. 작업이라야 어쩌다 손 한번 맞닿는 정도였지만. 그 옆 크고 작은 엽전 조각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뜨려져 있던 '본전 다방'도 충무로의 랜드 마크였죠. 그 앞 허름한 건물에 있던, 독일어 원서만 취급하던 '소피아 서점'도 생각나는군요. 난 그곳을 둘러보기만 했어요. 거금을 들여 원서를 구입할 형편은 못됐으니까요. 근데 내가 정작 가보고 싶은 곳은 '알테 리베(Alte Liebe옛사랑)'란 말이죠. 그곳이 대체 어떤 곳이길래?

알테 리베의 쇠고리가 달린 투박한 검은색 문을 밀고 들어서면 왼쪽 벽면에 중절모를 쓰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어요. 영화 '모로코'에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하고, '릴리 마를렌(Lili Marlene)'을 부르기도 한 전설적인 그 여배우 말이에요. 게슴츠레한 눈에 각선미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손꼽히기도 하죠. 우리 한 번 그녀가 부른 '꽃들은 어디로 갔나?(Sagt mir, wo die Blumen sind)'를 독일어 버전으로 한 번 들어 보아요. 삶에 대한 회환과 성찰이 가득 담긴, 가슴을 헤집는 거친 질감의 그 노래를.

알테 리베는 테이블과 벽면을 진한 갈색의 통나무로 만들어 운치가 있었어요. 우린 그곳에서 갓 송출되기 시작한 깨끗한 음질의 FM 방송을 들으며 칵테일을 홀짝이곤 했죠. 코코아 냄새나는 카카오피스, 솔잎 향 나는 베네딕틴, 그리고 위스키 종류인 드람부이…. 요즘 젊은이들도 자장면 먹고 그보다 비싼 프랜차이즈 커피를 마시잖아요. 사람들은 말하곤 하죠. 그것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건설적' 행위라고. 말하자면, 우리도 그때 그곳에 앉아 딱히 비난할 수만은 없는 문화적 허영에 젖었던 거라고요.

알테 리베에서는 또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니까요. 그곳에 앉아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면 짙은 어둠 속에 빨간 점이 도깨비불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사람을 미혹하는 거예요. 지금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놀랍게도 한 무리의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던 거였어요. 그 젊은 여자들이 누구냐고요? 나도 잘 모른답니다. 주위가 너무 캄캄했으니까요. 아마 전혜린(田惠麟)의 후예들이지 않을까 싶은데…. 독문학자이자 번역가, 수필가이기도 한 광기의 천재 전혜린!

자신에게 드리운 내적인 고뇌를 감당 못해 끝내 발광(發光發狂)한 슈퍼스타 전혜린을 흉내낸 그 시절 젊은 여자들이 지금쯤 할머니로 변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해지는군요. 늦깎이 문필가라도 되었음 좋으련만…. 어떻든 우리들의 전혜린이 걸었던 모색(暮色) 짙은 슈바빙(독일 뮌헨의 예술가 촌)의 인적 끊긴 거리와, 그녀가 추위에 떨며 식은 부르스트(Wurst흰 독일소시지)를 사먹던 키오스크(Kiosk 작은 구멍가게)가 생각나네요. 그녀가 쓴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 읽고 싶고요.

엊그제 주말 일이 있어 실로 오랜만에 명동에 가보았답니다. '우리시대의 사랑'이 골목마다 작은 도적처럼 엎디어 있어요. 내친 김에 충무로도 느릿느릿 소오(笑傲)해 보았지요.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그냥 말이에요. 충무로도 명동권역에 포함되는 거잖아요. 물 먹으러 갔다가 세수할 수도 있는 거고. 인걸은 간 데 없고 블링블링한 팬시숍에 플래그십 의류 스토어, 수상한 럭셔리 건물들만 늘어서 있어 울적한 마음이었어요. 그때 일본인들로 보이는 몇 무더기의 관광객이 온통 도로를 점하며 왁자지껄 몰려오는 거예요. 순간 시야가 흐려지며 도로가 텅 비는데 길가에 한 소녀가 훌쩍이며 나타나는군요.

"웬 소녀가 울고 있네~ 긴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네~"

[필자소개]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Marlene Dietrich (1901~1992 독일, 영화배우 겸 가수) 
Sagt mir, wo die Blumen sind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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