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때 敵과 동지가 함께 불렀던 노래 [릴리 마르렌]

by 이태식 posted Aug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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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 Marleen

릴리 마르렌

2차 대전 때 敵과 동지가 함께 불렀던 노래




     독일계 미국 여배우 마르렌 디트리히가 부른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EBS 명화극장 프로에서 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1914년 12월24일 서부전선(독일-프랑스 국경)에서 일어났던 實話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참호전을 펼치던 프랑스, 영국, 독일군대가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일시 휴전하고 중간지대에 모여 함께 미사도 드리고 축구도 하고, 아내 사진도 보여주면서 친하게 되는 줄거리이다.

기독교라는 공통의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해프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한의 대결은 이념의 차이, 즉 가치관의 차이를 본질로 하고 있음으로 6.25 전쟁이나 그 후에 이 영화와 같은 장면을 만들 수 없었다.

이런 사례는 민족보다 이념이나 종교가 더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은 6.25와 같은 이념전쟁이 아니었다. 민간인이나 포로에 대한 학살이 6.25처럼 많지 않았다. 同族間 이념전쟁은 異民族間의 보통전쟁보다 더 비참할 수가 있다. 
  
민주국가 對 파쇼국가라는 측면에서 이념전쟁의 색깔이 짙었던(6.25나 월남전쟁 정도는 아니지만) 2차 세계 대전중 연합군과 독일 군대 사이에서 다 같이 불리던 노래가 있었다.

릴리 마르렌(Lili Marleen)이란 독일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1차세계 대전중이던 1915년에 독일사람 한스 라이프가 지었다. 함부르크 출신의 교사였는데, 軍에 징집된 후에 썼다. 릴리 마르렌은 자신의 여자 친구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제목이다. 詩의 原名은 '등불 아래 소녀'였는데 '릴리 마르렌'으로 더 유명해졌다.

1939년 이 노래는 랄레 안델젠이란 여자 가수에 의하여 레코드로 취입되었다. 작곡가는 노르베르트 슐체. 
  
1941년 독일군대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베오그라드에 독일군 방송국을 설치했다. 이 방송국에 근무하는 한 장교가 비엔나로 휴가를 나오게 되었는데 레코드판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장교는 中古 레코드 가게에서 '릴리 마르렌'을 사 가지고 왔다. 이때까지 이 판은 겨우 700장이 팔렸을 뿐이었다.

베오그라드의 독일군 방송은 레코드판이 많지 않아 '릴리 마르렌'을 자주 틀었다. 괴벨스가 이끌던 나치 독일의 선전부는 이 노래가 厭戰(염전) 분위기를 퍼뜨릴 수 있다고 판단, 방송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랬더니 나치, 이탈리아 등 主軸國(주축국)의 병사들이 방송국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주변에 배치된 부대의 병사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싸우던 롬멜 軍團 병사들도 "릴리 마르렌을 듣고싶다"고 방송국에 요구했다. 롬멜도 이 노래를 좋아하여 베오그라드 방송국에 "매일 듣도록 해달라"고 했다.

이렇게 되니 괴벨스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베오그라드 방송은 아예 밤 9시55분 프로의 로고 송으로 박아버렸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방송을 듣다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작전중이던 연합군은 가사를 바꿔 불렀다. 독일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중이던 마르렌 디트리히도 이 노래를 불렀다. 이 여배우의 이름 때문에 릴리 마르렌을 디트리히가 처음 부른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마르렌 디트리히가 부른 '릴리 마르렌'이 가장 유명하다.

'뉴렌베르크 재판'이란 1960년대 영화엔 마르렌 디트리히가 독일인으로 출연하고 맥주집에서 독일사람들이 '릴리 마르렌'을 합창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의 음반회사 RCA는 1944년에 페리 코모를 시켜 이 노래를 취입했다. 캐나다의 경보병 특수여단은 지금도 '릴리 마르렌'을 느린 행진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릴리 마르렌을 부른 최초 가수인 랄레 안델젠은 전쟁중엔 공개장소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戰後 그녀는 사라졌다가 1959년 '네버 온 선데이'라는 영화의 주제곡(原曲은 멜리나 메르쿠리가 불렀다)을 독일어로 부르면서 인기를 얻었다. 안델젠은 1972년 67세에 비엔나에서 죽었다. 그가 묻힌 랑게욱에는 '릴리 마르렌'을 기념하는 안델젠의 동상이 서 있다.

릴리 마르렌은 경쾌하면서도 哀調를 띄고 있는 노래이다. 한 일본인 작가는 '릴리 마르렌을 찾아서'라는 實錄을 쓰기도 했다. 릴리 마르렌은 2차 세계대전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敵과 我軍이 같이 불렀기에. youtube.com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수들이 부른 '릴리 마르렌'이 올라 있다.

'가고파' '목련화' '수선화' 를 작곡한 金東振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곡들은 다 서정적이지. 서정적이라고 해서 恨이 맺힌 노래는 아니야. 서정적인 건 멜로디가 좋다는 얘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악 2악장 말이에요(이 대목에서 선생은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선율을 들려 줬다). 아주 경쾌한 노래예요. 그런데 들으면 슬퍼져요. 일종의 감격이란 게 느껴져요. 감동을 주는 노래는 아름답고, 힘있게 하면 힘있는 거죠. 아름다운 선율이 있는 음악은 다 슬퍼요. 좋은 건 다 슬픈 거와 통해요."

경쾌한 노래가 슬픈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인가?

* 릴리 마르렌이란 노래제목과 혼동되기도 한 마르렌 디트리히라는 여배우는 1992년에 미국에서 91세로 죽었다. 가수와 여배우를 겸한 全天候 예능인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최초의 독일 배우였다. 디트리히는 민주주의가 滿開하였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를 체험한 예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히틀러의 反유태주의를 증오하였다. 1939년에 미국시민이 된 이후엔 연합군 위문공연을 많이 다녔다. 위험한 戰線에 왜 그렇게 자주 가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디트리히는 "그것이 고귀한 행동이므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릴리 마르렌을 독일어로 부른 것도 연합군의 反나치 심리전을 돋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는데 그녀는 이를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래에 디트리히의 릴리 마르렌을 들을 수 있다.

- 글쓴이 趙 甲 濟




Lilli Marleen _ Marlene Dietrich


Lili Marleen (원곡) _ Lale Andersen



<마르렌 디트리히의 노래 동영상>


젊은 시절의 마르렌 디트리히


노년의 마르렌 디트리히 (1972년 London Concert)


원곡을 부른 Lale Andersen (1968년)



<다른 가수의 노래>


Milva _ Lili Marleen


Zarah Leander _ Lili Marleen


Dolores Keane _ Lili Marleen


飯島真理(이이지마 마리) _ Lili Marleen


James Last Orchestra _ Lili Marleen




《e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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