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한 문학잡지가 한국문인의 애창곡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가운데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들이 비단 문인들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노래가 우리가 지닌 정조의 여러 측면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백설희 이후 배호, 문주란, 조용필, 심수봉, 한영애, 장사익 등 내노라하는 가인들이 이 노래를 변주하였다.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이 되고 마침내 얄궂은 노래가 되듯 몰락하는 봄날에 바쳐진 이들의 곡조는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 슬픔의 존재감을 이끌어내기에 족하다.
봄날은 배신의 징표 / 가을에 지는 낙엽은 봄날 떨어지는 꽃잎 만큼 강렬할 수 없다. 낙엽이 자연스런 조락(凋落)으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그린다면 낙화는 비애에 젖게 한다. 물론 휘날리는 꽃잎들의 군무에서 환희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봄날의 복잡한 심경은 개화와 낙화의 시공간 속에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기우는 봄에서 편치 않는 마음을 갖는 것 같다. '봄날은 간다'를 애창곡으로 삼는데 그치지 않고 같은 제목의 시를 쓴 시인들 또한 여럿이다.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다./봄날은 간다."로 끝맺음하고 있는 고은의 시를 위시하여 황동규, 김명인, 이승훈, 기형도, 안도현, 정일근, 이재무, 고재종, 조용미, 서상영, 허수경 등 허다하다. 개중 생동하는 봄을 예찬한 이 없지 않으나 대다수 오지 않는 사람이나 못다한 사연을 떠올리고, 간절하지 않은 안부와 내용 없는 추억과 시들한 사랑과 희망 없는 삶을 말하고 있다. 기형도가 "봄날이 가면 그뿐"이라고 할 때 정일근은 우리 모두 파장의 구경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들 시인들에게 봄은 세계가 던지는 배신의 징표이자 이러한 세계에 대한 불화와 반목의 메시지이다. 매화 지고 목련 터지는 봄. 하지만 우리네 마음 속 봄날은 간다. 맹세가 티끌이 되고 먼지가 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과 퇴폐와 절망이 뒤엉킨 '봄날은 간다'가 여전히 애창곡의 수위를 유지할 것임에 의심이 가지 않는다. 더 많은 시인들이 변함없이 '봄날은 간다'를 노래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우리가 슬픔을 노래할 때 기쁨은 그림자 처럼 슬그머니 기어든다. 마찬가지로 퇴폐로 이끌리는 감각에서 신생의 상상력이 싹튼다. 절망은 희망의 끝이기도 하지만 그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가 '봄날은 간다'를 변함없이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백설희에 연원(淵源)한 애상(哀傷)과 배호와 문주란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 한영애에 깃든 퇴폐의 기미와 더불어 장사익에게서 울려나는 거부(拒否)의 몸짓을 우리는 모두 사랑한다. 이들을 통해 희망의 흔적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굳이 한(恨)의 미학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를 애창하는 일을 억압된 정서의 분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다양한 감성을 같은 유형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허무의 원칙 또한 방기(放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무(無)로 환원시키는 것은 감성의 치안질서를 세우는 일처럼 독단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서로 다른 음색으로 '봄날은 간다'를 목 놓아 부르자. 슬픈 낙화의 아이러니로부터 무서운 희망을 찾자.
- 구모룡(한국해양대 교수·문학평론가)의『봄날은 간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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