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하나로 철의 장막을 뛰어넘은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숨졌다. 79세. 뉴욕타임스는 클라이번이  2월 27일(수) 텍사스주 자택에서 골(骨)암으로 사망했다고 28일 보도했다. 이날 그의 공보담당자인 메리 루 팔콘은 클라이번이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클라이번은 지난 해 8월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힌 뒤 투병을 해왔다.

클라이번은 1934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덕에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가로의 길은 일찍부터 정해졌다. 석유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그를 선교사로 키우려 했지만 연주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17세 때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한 클라이번은 54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한다. 콩쿠르는 49년부터 우승자를 내지 못했는데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등이 심사위원이었다.

58년, 클라이번은 미국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다. 러시아의 자존심인 차이콥스키를 내세운 콩쿠르, 그것도 첫 대회에서 미국 피아니스트가 우승한 건 두 나라에게 충격이었다. 한 해 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충격을 받은 미국민들에게 클라이번은 영웅이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표지에 실으며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고 했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클라이번은 각종 대회에서 우승해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7세에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해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로지나 레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23세가 되던 1958년, 그는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1위에 선정돼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결선에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친 클라이번의 연주가 끝나자 감격한 관객들의 열광적인 기립박수가 8분이나 이어진 일화가 있다.

냉전이 최고조이던 당시 이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려 미국인 피아니스트였던 클라이번이 잠시나마 미·소 냉전시대 해빙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는 평화의 상징이 됐다. 이때부터 클라이번은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명연주였던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제1번>은 클래식 음반 최초로 100만 장이 팔렸고, 빌보드 앨범차트에 125주 동안 머물면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해리 트루먼 이후 모든 미 대통령을 위한 연주회를 열었으며 과거 수년 동안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전념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를 끝으로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59년 뉴욕필과 협연했지만 혹평이 쏟아졌다. 78년 무대를 떠나 89년 복귀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였다. 2008년 인터뷰에서 “차이콥스키 콩쿠르 후 20년 동안 그 순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콩쿠르 우승이 큰 압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를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009년 이 콩쿠르에서 준우승하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인용글)


55년전의 반 클라이번은 내게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대학시절 혜화동의 TIME지 강독모임에 나가던 때 그의 사진이 표지로 실린 TIME지를 교재로 공부하던 일이 기억된다. 강사는 黃(?)모 육군중령이었는데 "The Texan Who Conquered Russia"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관심깊게 해석하고 음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임한 당시는 미국과 쏘련의 냉전이 최고조였다. 23세 새파란 미국 청년이 모스크바로 처들어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첫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한 기사가 다소 의외였지만, 철의 장막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는 음악의 힘, 문화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승곡인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반 클라이번 음반을 입수한 것은 그 몇년 후 미국에 가있는 친지를 통해서였는데 아직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