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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라는 날개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우리에게, 특히 3040세대에게 가끔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세 번째 빈국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총생산(GDP)이 80달러 정도였으니까요. 1972년 우리나라 대표팀이 뮌헨 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올림픽 중계를 하기 위해 파견된 방송팀이 5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민영 방송국에서는 올림픽 방송을 위한 취재단을 파견할 꿈도 꾸지 못했다(KBS 정희준 기자의 ‘그때 그 현장 못다 한 이야기’)”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는 372명(KBS 140명, SBS 122명, MBC 110명, 한국방송단에 배정된 출입증 기준)이 파견되었다니 실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1950년대 말에 독일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세계대전 패전국이라는 멍에에서 자유롭지 않아 외국 학생, 특히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필자가 느낀 사회 분위기는 대체로 우호적이었습니다. 즉 ‘인종차별’ 운운할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대학 사무국에 가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담당자는 의외로 반기는 기색을 하며 흔쾌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설명하길, 신입생이기 때문에 규정상 첫 1년은 1인실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2인실’을 배정한다고 했습니다. 필자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하면서, 독일인 룸메이트와 지내면 낯선 독일문화를 익히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방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받고, 배정받은 방을 찾아갔습니다.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먼저 와있는 독일인 룸메이트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필자를 본 그 ‘방 친구’는 놀라워하기보다는 많이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때 난생처음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한 달가량 의식적으로 ‘방 친구’와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고,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고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아마도 처음 겪는 ‘속병’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오후 예상치 않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 친구’가 혼자서 볼륨을 크게 해놓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아름다운 선율을 오랜만에 들은 필자는 감동이 밀려와 그만, “오 베토벤!” 하고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그 순간 ‘자존심도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은 바로 ‘방 친구’였습니다. 침대에 누워 한가로이 음악을 감상하던 그가 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네가 어떻게 이 음악이 베토벤의 곡이라는 것을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무슨 외계인을 만난 듯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면서 말입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파스토랄(Pastoral)이 아니냐?” 하고 덧붙였더니, “도대체 어떻게, 어디서 알았느냐?” 하고 따지듯 묻고는 “너는 음악을 전공하다 의학을 공부하느냐?” 하면서 집요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차분하게 “우리나라에서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클래식 음악을 고등학교(Gymnasium) 음악시간에 다 배운다” 고 말했습니다. 그는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실토하자면,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닌 때는 한국전쟁 직후여서 음악시간에 풍금조차 없어 부실하기 그지없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음악담당 선생은 고육지책으로 수업시간에 ‘유성기(留聲機)’를 틀어주면서, 이게 베토벤의 교향곡이고, 이게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설명하곤 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귀가 뚫린’ 것입니다).

바로 그날부터 ‘방 친구’는 기숙사 이곳저곳으로 필자를 끌고 다니면서 독일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글쎄, 먼 한국에서 온 이 친구가 베토벤을 안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자연스레 독일 학생들과 어울리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이라는 날개를 달고 편견의 벽을 훌쩍 넘은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독일에서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아시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유학 온 ‘불쌍한 학생’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당시 ‘방 친구’가 필자와 처음 만나는 순간 실망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면서 편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지를 늘 상기합니다.

‘베토벤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문화 예술이 지닌 힘이 얼마나 큰지를 되새깁니다. 인종 간에, 나라 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편견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문화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문화 예술을 국가 경쟁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나 봅니다.
(자유칼럼그룹, 2013.2.22)

- 글쓴이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회장




Beethoven Symphony No.6 'Pastoral"(전원) 1악장
Berliner Philharmoniker, 지휘 Herbert von Kara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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