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피아노곡 /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18"

by 이태식 posted Jul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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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Rac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18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in A minor, Op.43, #18




18th Variation, Andante cantabile / From the movie 'Somewhere in Time'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이며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는 뛰어난 피아노곡을 많이 지었다. 그의 만년의 걸작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24개 주제의 변주곡인데, 그 중 18번째 변주곡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영화 "사랑의 은하수(Somewhere in Time, 1980)"에 삽입되고 EBS라디오의 시그널뮤직으로도 채용되어 낯설지 않다. 3분 남짓한 이 곡은 안타까운 그리움과 회한에 겨웁듯 가슴 저리게 애절하고 달콤하다. 아래에 한국이 낳은 거장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18을 따로 들어보고, 얼마전 내한공연하여 호평을 받은 중국의 신예 여류 피아니스트 유자 왕의 전곡(23분) 연주를 함께 감상한다.




#18 Variation / Kun-Woo Paik (백건우)


파가니니에 관한 전설에는 다분히 환상적인 측면이 있었다. 19세기 초에 활약했던 그의 신출귀몰한 바이올린 연주 솜씨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였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그런 소문은 한동안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파가니니는 죽은 뒤 고향에서조차 거부당한 채 오래도록 구천을 떠돌아야만 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파가니니는 낭만주의를 선도한 거장으로 자리매김했고, 따라서 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언제나 초자연적인 주제에 열광했던 러시아 예술가들은 파가니니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는데, 러시아 출신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회심의 걸작인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현란한 색채와 악마적 기교,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로 가득 차 있다.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in A minor, Op.43 (전곡)
piano, Yuja Wang(王羽佳, 1987-Beijing, China)
NHK Symphony Orchestra, cond Charles Dutoit(샤를 뒤투아)
(#18은 동영상의 15분대에서 들을 수 있음.)


이 곡은 기본적으로 변주곡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변주의 주제로는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 중 마지막 곡의 A단조 선율이 채택되었다. 아울러 라흐마니노프는 이 ‘카프리치오 주제’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주제로 ‘죽음’ 또는 ‘심판의 날’을 암시하는 중세의 ‘디에스 이레’(dies irae) 선율을 도입함으로써 작품의 독창성과 구성미를 강화하고 나아가 자칫 가볍게만 비칠 뻔했던 작품에 보다 심오한 아우라를 부여했다. 전곡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각각은 빠르게(제1~10변주), 느리게(제11~18변주), 빠르게(제19~24변주)의 세 템포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곡은 3악장으로 구성된 통상적인 협주곡의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느린 악장에 해당하는 두 번째 부분에는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스케르초 풍의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 방식은 라흐마니노프의 다른 협주곡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곡은 알레그로 비바체의 짤막한 서주로 시작되는데, 9마디에 걸친 관현악과 피아노의 화음이 주제를 암시한 다음 곧바로 주부로 진입한다. 주부에서는 통상적인 변주곡의 관례를 깨고 주제의 제시에 앞서 첫 번째 변주가 먼저 나온다. 주로 관현악에 의한 단순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제1변주에 이어 ‘카프리치오 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제시되고, 피아노는 제2변주부터 전면에 나선다.

이후 제5변주까지는 피아노와 관현악의 경묘한 얽힘이 두드러지면서 숨가쁘게 진행되다가, 제6변주로 접어들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마침내 제7변주로 넘어가면 또 하나의 주제인 ‘디에스 이레’ 선율이 첫 주제와는 대조적인 무거운 표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유래한 어둡고 악마적인 분위기가 제10변주까지 지속되는데, 그 흐름은 리스트풍의 변화무쌍한 악구들이 장식하고 있다.

잠시 음악이 멈췄다가 제11변주로 접어들면, 현이 여리게 연주하는 트레몰로 위로 피아노가 역시 리스트풍의 카덴차를 연주한다. 이 변주와 미뉴에트풍의 제12변주는 다소 정체된 느낌을 유발하는데, 피아노의 차분한 움직임 위로 관현악이 한층 다채로운 색감을 자아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음악은 제13변주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고, 박력 있는 행진곡풍으로 전개되는 제14변주에서 한 차례 고조된 후, 제15변주의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제16변주로 넘어가면 흐름은 다시 가라앉고 오보에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준비하게 된다. 이제 부드러운 제17변주를 거쳐 제18변주에 다다르면, 마침내 유명한 ‘안단테 칸타빌레’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감성적 기운을 가득 머금은 감미로운 선율이 서서히 상승하여 찬란하지만 애틋한 고조를 연출하는 이 감동적인 장면이야말로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백미라 할 만하다.

제19변주, 현의 피치카토에 이끌려 피아노가 다시금 약동하기 시작한다. 음악은 마치 곡의 첫 부분으로 돌아간 듯 경묘하고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그것을 더욱 확대, 강화시키면서 또 한 번의 고조를 향해 나아간다. 제22변주는 악보 상으로 가장 긴 변주인데, 처음에 행진곡처럼 출발해서 피아노가 화음을 연주하면 점차 부풀어 올라 정점에 도달한 후 빠른 패시지를 거쳐 힘찬 카덴차로 마무리된다. 이후 음악은 종결을 향하여 숨 가쁘게 치달아 간다. 마지막 변주에서 피아노가 셋잇단음표와 스타카토를 연주하고 목관에 주제가 나타나 다시 피아노로 연결된 후, 코다(종결부)에 이르러 관현악에 의해 ‘디에스 이레’ 선율이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터져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아노가 주제의 단편을 연주한 후 갑작스레 막이 내린다. 마치 ‘누군가 촛불을 훅 불어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남겨둔 것’처럼. (인용글)



《e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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