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관의 배뱅이굿
2002년 8월 24일 운현궁에서 열린 명인명창 대공연에서
李殷官
[1917.11.27~강원 철원]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올해 97세의 국보적인 명창 이은관이〈배뱅이굿〉을 시작한지가 지난해로 80주년을 넘겼다. 제자들이 마련한 기념무대가 12월 26일 충무아트홀에서 열렸는데 이은관은 여기서도〈배뱅이굿〉의 일부를 불렀다. 요즘에도 그는 아침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이은관 민요교실'에 출근한다. 신당동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와서 서대문 영천시장 거리, 노래방과 술집이 다닥다닥한 5층 건물 옥탑방 민요교실의 가파른 계단을 거뜬히 오른다. 노익장이란 단어가 오히려 무색한 그는여기서 3년후의 100세 기념 무대를 펼칠 꿈을 다듬고 있다.
이은관은 1931년 철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국악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신불출 만담일행'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41 ~45년에는 무대생활을 했다. 1946년에 대한국악원에 입단했고 '민요국극단'을 조직·운영했는데 이때 주로〈배뱅이굿〉을 공연했다. 1968년 국악협회 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1992년 이래 학원장을 맡았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로, 현재는 고문으로 이름을 걸고 있다. 1984년 10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김경렬·김경선 형제에게 전수시키고 있다.
원래〈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웹에서 종합)
|
《ess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