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 김천애 Sop.
김형준 詩, 홍난파 曲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노라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홍난파 (본명 홍영후)의 <봉선화>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도쿄 우에노 음악

학교에 다니던 홍난파는 이 해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경성 악우회'라는 음악 단체를 조직, 음악 보급운동을 폈다.그는 소설 창작에도 손을 대어 그 해 4월 <처녀혼>이라는 단편집을 냈는데, 이 때 그 단편집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다. 뒤에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씨의 선친)이 가사를 붙여 민족의 주제가가 된 <봉선화>가 탄생했다.
이 노래를 먼저 부르고 또 널리 퍼지게 한 공로자 소프라노 김천애는 "페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선화>의 가락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도 모르지요..."라면서 김형준가 <봉선화>의 가사를 짓게 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김형준씨가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었죠. 또 김형준씨는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대요."

<1930년대 경성후생실내악단의 단원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김천애는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홍난파의 생가>
김천애는 그 해 가을 귀국해서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그때마다 소복 차림으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봉선화>의 제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제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이다.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여름에 피었다가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이 2절에서 멈추었다면 <봉선화>도 한낱 <아리랑>류의 만가에 그쳐 버렸을 것이라는 게 김천애의 얘기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의 광고에 나오는 이인범·김성태·김천애·이인형>
"1절과 2절은 마지막 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아요. 비록 모질고 찬바람에 형골마저 사라져 버렸을지언정 혼백은 길이 남아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그 애절한 민족의 염원이 <봉선화>를 단순한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거지요."라고 김천애는 3절 가사의 뜻을 강조했다. 3절 가사는 <북풍 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홍난파는 1897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났다.16살 때 조선 정악전습소에 입학, 2년 후에 졸업하여 음악교사를 하다가 일본으로 가서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수업을 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셀우드 음악학교를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이 된 <봉선화>외에 그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많은 뛰어난 가곡을 남겼고, 바이올린 곡으로 <로맨스>, <애수의 조건>등을 작곡했다.그는 1941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천애 (1919-1995) 평안남도 강서 출생
김천애님은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국내에 돌아와 음악활동을 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8년 성악과장으로 제직했고. 그 후 숙명여대 음대교수, 음대학장등을 역임하다가 1972년 시민회관 (지금 세종문화 회관터)에서 갖은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국내에는 오지 못하다가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후 1990년 국내에 잠시 돌아와 KBS-TV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애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던 그는 1995년 3월 30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1940 년대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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