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운 - 그러나 - 고독한
김 갑 수 (시인·음악평론가)
책을 읽다 발견한 구절 하나를 커다랗게 프린트하여 작업실 벽에 붙여 놓았다.
"Frei - Aber - Einsam"
"자유로운 - 그러나 - 고독한"이라는 뜻이다. 브람스의 절친한 벗 요제프 요아힘이 건네주었다는 말인데, 브람스는 그 말대로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독신의 생애를 살았다.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여 사람들과 원만히 어울리지 못했다는 사나이. 누나 같고 엄마 같고 때론 연인 같은 클라라 슈만이 평생토록 섬세하게 돌봐주어야만 했다던 황량한 북독일의 수줍은 사나이.
내 사주는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없는, 하늘 아래 외톨이로 나온다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 아직 내게는 가족도 있고 일없이 전화할 수 있는 친구도 한 명 있다. 그런데 왜 이리 하루하루가 대책 없이 아인잠(고독)하기만 할까.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 작업실에 망망히 빈 쪽배처럼 떠서 하루 종일 벽을 노려보며 음악을 듣는다. 프라이 - 아버 - 아인잠... 아! 프라이와 아인잠은 동의어였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될수록 사람들과의 인연을 피해야 한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된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자기 존재는 누구의 무엇이라는 관계만이 남는다. 그리고 시간은 모래알처럼 손가락새로 빠져 달아난다. 가야 할 문병, 고마운 초대에 일일이 응하면서 기나긴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택한 자유 속에서 나는 한없이 외롭다. 병에 익숙하다고 해서 통증까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되묻는다. 대체 이 자유의, 고독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바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는 것뿐이다." 작고 낮게 쪼그리고 앉아 걸신들린 것처럼 온종일 판을 돌려대면서 반문한다. 브람스의 실내악 곡들과 교감하는 이 혼자만의 시간에도 어떤 '가치'라는 게 있는 것일까.
고독의 시간이 있어야 작가도 음악가도 작품을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고독의 질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발표된 작품에 의해서일 뿐이다. 나는 한 권의 시집을 낸 이래 거의 작품 발표를 하지 못해왔다. 그 시간에 줄기차고 집요하게 음악을 들었다. 후회하자니 억울하고, 억울해하자니 염치가 없다. 과연 고독한 대신 자유로웠을까. 프라이에게 아인잠이 묻는다.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이야기 :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중에서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시인 김갑수는 요즘 TV방송에서 자주 본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지독한 클래식 매니어로 더 유명하다. 수만장의 LP 음반에다 30번도 넘게 오디오 기기 바꿔치기를 거쳐 쌓아올린 그의 거창한 오디오룸 '줄라이홀'은 이미 장안의 명물이 된지 오래다. (2014.6.3 열린게시판에 소개함) 그의 음악에세이집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2001, 웅진닷컴>를 다시 한번 읽고 있다. 젊은 한 때 LP음반 컬렉션 흉내의 겉멋을 부려본 내게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의 탐욕적인 음악 열정과 몰입, 그리고 끝모를 클래식 담론은 경이롭기만 하다.
《e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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