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타레가는 자신의 옛사랑을 떠올리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 사진(위)은 타레가. 작은 사진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담긴 앨범
클래식 기타 음악의 최고봉…
타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가을엔 클래시컬 기타(classical guitar) 음악이 딱 제격이다.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래된 영화 ‘금지된 장난(Jeux Inter dits)’ 때문이다. 르네 클레망(Rene Clement) 감독의 1952년 작이었던 이 영화는 동심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과 성인들의 에고이즘을 고발한 작품이다. 영화 전편을 흐르던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1927–1997, Spain)의 기타 선율 ‘로망스(Romance Anonimo)’는 영화 제목을 혼동할 만큼 아름다운 곡이었다.
이후 여고 시절에 만났던 박영한 작가의 ‘머나먼 쏭바강’이라는 작품. 작품 속 황 병장은 연대 기타동아리 오르페우스 출신임을 줄곧 이야기하면서 틈틈이 기타를 연주하고 기타와 함께하는 것으로 괴로운 전쟁의 한복판을 견뎌 나간다. 그 절절함 때문에 소설 속의 기타 소리가 마음으로 그대로 전해져 오던 것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9월에 만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 연세대 오르페우스 출신 서정실 씨다. 원래 공대생이었으나 오르페우스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인생의 방향을 기타로 틀어 버린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가 클래식 기타 음악의 ‘아담’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연주하자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트레몰로(같은 음을 같은 속도로 여러 번 치면서 연주하는 주법)가 특히 애잔하게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유럽에 현존하는 아랍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궁전으로 꼽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궁전이다. 1492년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이 궁전을 내어줬다. 이후 스페인은 근대국가로의 변화를 맞지만, 알함브라 궁전만큼은 800여년간 내려온 이슬람문화의 찬연함을 간직한 존재로 홀로 유럽 속에 서 있게 됐다.
스페인의 기타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프란시스코 타레가에게도 이 궁전의 아름다움은 눈에 띄었다. 1896년, 당시 타레가는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했고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그라나다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타레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알함브라 궁전이었다. 달빛이 드리워진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탄생했다.
작곡가의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탄생 배경과 아름다움의 백미로 꼽히는 환상의 궁전이 더해지면서 이 곡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곡이 됐다. 기타를 잘 몰라도 이 곡만큼은 낯설지 않을 정도로.
기타리스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에서 사람들은 아스라한 시간의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 아련함이 공연장 전체를 촉촉하게 적시면서 필자 역시 금지된 장난에, 쏭바강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첫사랑의 추억을 더듬은 건 아니냐고? 노코멘트. 낙화(落花)의 계절에 개화(開花)라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