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졸라의 ‘사계’는 비발디의 ‘사계’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사진은 피아졸라와 피아졸라의 ‘사계’가 담긴 앨범.
피아졸라의 ‘사계’
우울하고 나른한, 깊은 가을에…
눈한번 깜빡였는데 어느새 10월의 문턱을 넘어서 있다. 노을, 지는 해, 석양을 마주할 시간이 온 것이다. 참으로 시간이란,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란 지나치게 정직하고 완벽해서 벅차다 싶을 때가 있다.
10월의 공연 스케줄을 보니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사계(Four Seasons in Buenos Aires)’ 연주가 많이 눈에 띈다. 현악 연주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접하는 무대 위에서의 앙코르 곡이리라. 1년 중 사계절의 의미를 가장 많이 반추하게 되는 달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피아졸라는 비발디의 ‘사계’가 작곡된 지 약 200년 후 태어났다. 비발디의 ‘사계’가 처음부터 바이올린 협주 연주 스타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순서대로 각각 4악장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피아졸라의 ‘사계’는 좀 다르다. 처음부터 피아졸라의 의도 아래 계획돼 작곡된 하나의 곡이 아니라, 각각 따로따로 작곡한 것을 후대에 편곡하면서 완성된 곡이라는 차이가 있다.
일명 ‘탱고의 전설’로 불리는 피아졸라는 탱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작곡가이자 반도네온(Bandoneon·작은 손풍금) 연주의 거장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음악인 탱고는 본래 춤곡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피아졸라의 손에 이르며 춤으로부터 독립한, 연주를 위한 탱고로 재탄생된다. 클래식과 재즈에 접목한 새로운 의미의 탱고 ‘누에보 탱고(Nuevo Tango)’가 탄생된 배경이다.
피아졸라는 이런 신개념의 탱고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절에 접목한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계절의 순서대로 작곡한 것은 아니고 여러 시기에 걸쳐 마음이 동하는 대로 각각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계절의 항구 풍경을 그렸다. 여름(Verano Porteno, 1964), 가을(Otono Porteno, 1969), 봄(Primavera Portena, 1970), 겨울(Invierno Porteno, 1970)은 이렇게 나오게 됐다. 반도네온, 바이올린, 일렉트릭 기타(Electric Guitar), 피아노, 더블베이스(Double Bass)의 5중주 편성이었다.
전통 클래식 음악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탱고. 남아메리카인의 원초적이며 폭발적인 정열이 그대로 담긴 피아졸라의 이 선율에 매료된 이가 20세기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였다. 크레머는 피아졸라의 탱고 오페라 작품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을 발견하고 그 매력적인 선율에 환호한다. 이후 다른 피아졸라의 작품을 뒤져 나머지 계절을 찾아낸 크레머는 작곡가 친구인 레오니트 데샤트니코프에게 편곡을 부탁한다.
그렇게 이 곡은 비발디의 ‘사계’와 함께 오늘날 많은 현악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리며 사랑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됐다. 맑고 청명함으로 연상되는 비발디 사계절과는 다른 우울하고 나른한, 그러면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로. 피아졸라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반도네온이 포함된 연주도 좋고 기돈 크레머의 현악 연주도 좋다. 이맘때 특히 남다를 음악이다. 10월, 깊은 가을 아닌가.
▶ 감상을 원한다면… [CD] 기돈 크레머, 크레머라타 발티카, NONESUCH [CD] 에오스 기타 콰르텟, Divox
[최영옥 음악평론가]
Astor Piazzolla's Four Seasons in Buenos Aires 중 Otono Porteno (항구의 가을) - Gidon Kremer, violin
Astor Piazzolla's Four Seasons in Buenos Aires 중 Invierno Porteno (항구의 겨울) - Gidon Kremer, violin
Astor Piazzolla's Four Seasons in Buenos Aires 중 Part 1 Clara Ju Mi Kang & The KNUA String Ensemble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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