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슈만 (글 : 김정운 교수)

by 김창현 posted Jul 1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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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탄생 200주년, 슈만과 클라라의 자취 찾아 떠난 슈만 투어
슈만과 클라라의 위대한 사랑? 사실은 클라라의 자작극이었다
올해는 낭만주의 정점에 있었던 작곡가 슈만이 탄생한 지 200주년 되는 해. 이를 기념해 전 세계 공연장에서 슈만의 작품들이 집중 조명을 받는다. 슈만과 클라라가 거쳐 간 ‘슈만 로드’를 잇는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뒤셀도르프는 다양한 콘서트를 준비 중이다. 슈만과 클라라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뒤셀도르프에서는 5월 28일부터 6월 14일까지 ‘슈만축제’(www.schumannfest-duesseldorf.de)가 열리는데, 6월 3일에는 정명훈의 지휘로 서울시향이 연주한다. 6월 8일에는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이 뒤셀도르프 심포니카와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54를 연주한다. 고도의 연주 기술이 필요한 이 곡은 “나를 위해 피아노곡을 써달라”는 클라라의 부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1847년 슈만 지휘, 클라라의 피아노 협연으로 초연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중 ‘슈만&브람스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
슈만과 클라라가 신혼생활을 한 라이프치히의 슈만하우스.
  독일에서 슈만의 자취를 찾아 떠난 길, 동행한 이봉기 코모스유통 사장은 슈만의 가곡 ‘헌정(Widmung)’을 흥얼거린다. “Du meine Seele, du mein Herz…(너는 나의 영혼, 너는 나의 심장…).” 그가 가사를 넣어 부르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경음악(?)이다. “라~라~라~.”
 
  법정투쟁까지 갔던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 슈만이 클라라 아버지와의 법정투쟁에서 승리해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날 밤, 그 벅찬 감동을 노래한 것이라고 벌써 몇 번째 설명을 붙이면서. 2년여 전 위 수술을 받았던 그에게 그 노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그 자신의 노래였다. 그는 여행 내내 채소만 먹으면서도 슈만의 노래를 불렀다. 매번 경음악으로.
 
슈만하우스 내부.

  내게 겨울은 슈베르트다. 봄이 되어야 슈만을 듣는다.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 중 ‘아름다운 오월에’는 내 애창곡이다. “Im wunderschoenen Monat Mai…(아름다운 오월에…).” 이 다음부터는 물론 경음악이다. 독일의 겨울은 혹독하게 슬프고, 우울하다. 습기가 가득한 한기는 뼛속 깊숙이 파고든다. 다른 계절도 그리 행복하지 않다. 한여름에도 우박이 내리고, 한나절에 눈・비・해・바람을 다 겪기도 한다. 그러나 5월은 다르다. 1년 열두 달 중 유일하게 따뜻함이 계속된다. 들뜬 여인들은 풀밭으로 나와 웃옷을 벗어젖힌다. 유학시절,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다 그 풍만한(?) 장관에 눈을 떼지 못해 자동차에 치여 며칠씩 병원에 누워 지낸 적도 있다. 5월의 따뜻한 햇살은 여인들의 풍만한 가슴을 통해 온다. 슈만의 가곡 그대로다. “오월에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츠비카우의 슈만 생가 내부.

  우리가 아우토반을 5시간 달려 라이프치히로 간 것은 단지 슈만의 집을 보기 위해서였다. 라이프치히는 바흐의 도시다. 바흐는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기억될 수 없었다. 슈만 역시 멘델스존이 신경 써주지 않았다면 라이프치히에서 제대로 된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슈만보다 한 살 위인 멘델스존은 자폐적 성향의 슈만이 음악계에 자리 내리도록 도움을 준다. 오늘날 라이프치히는 바흐, 멘델스존, 슈만의 도시로 기억된다.
 
  우리는 인젤슈트라세 18번지에 있는 슈만하우스를 찾았다.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집이다. 슈만은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인젤슈트라세, 난 거기가 너무 좋다. 그곳에서 난 아무것도 필요 없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클라라가 울며 걸었을 라이프치히의 밤거리.

  우리는 기대에 가득 차 집으로 들어섰다. 이런, 그 집에는 슈만을 기억할 만한 어떤 물건도 없었다. 여러 곳에서 복사해 온, 슈만과 클라라의 사진만 벽에 삥 돌아가며 붙어 있을 뿐이었다. 방 한가운데는 낡은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피아노도 슈만과는 상관없는, 단지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도대체 슈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이나 그에 관한 기록들은 어딜 가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츠비카우(Zwickau)에 가야 한단다. 그곳에 가면 슈만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튿날 눈길을 헤집고 바로 츠비카우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의 몇 배인 16유로를 내야 한단다. 내부의 전시내용은 라이프치히의 슈만하우스에 비하면 훨씬 충실했다. 그러나 이 단출한 전시품들을 사진 찍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동독지역이 아직도 자본주의적 시장원칙을 무시하는 것인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슈만은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비겁한 사내’
 
동행한 이봉기 사장(오른쪽)과 함께.

  그날 저녁, 라이프치히 호텔로 돌아와 챙겨 온 슈만 관련 자료를 꼼꼼히 읽었다. 슈만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들을 읽으며 나는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비겁한 사내들’이 자꾸 떠올랐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오직 ‘이 여자와 어떻게 한번 해볼까’만 궁리한다. 여자가 몸 또는 마음을 주는 순간 그들은 돌아선다. 갖가지 이유를 대며. 슈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지속적인 관계란 없었다. 클라라와 결혼에까지 이른 것은 클라라의 아버지가 지독하게 반대했기 때문 아닐까. 그는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법정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남자와의 사랑도 마다하지 않았다. 클라라와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괴테의 손자인 발터 폰 괴테와도 사귀었다. 돈 많은 공작 가문의 딸, 에르네슈타인과 사귀어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려다 그 처자가 그 집안에 입양된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 바로 걷어차기도 했다. 오래된 여인과 내연의 관계를 틈틈이 지속하다 매독에 걸리기도 했다. 평생 열등감과 정신적 피로감에 시달린 그는 손에서 술을 놓지 못했다. 똑똑한 클라라는 이런 남자와 결혼한 것이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츠비카우의 슈만 생가.

  10대 초반부터 알고 지낸 아저씨(슈만)와 결혼한 클라라는 행복했을까. 두 사람이 행복했던 시절은 법정투쟁 끝에 결혼해 라이프치히에 신혼살림을 꾸렸던 1840년, 오직 그 해뿐이었다. 슈만의 위대한 피아노 작품은 대부분 그 기간에 쓰였다. 〈시인의 사랑〉을 비롯한 가곡들은 1840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이들의 결혼생활은 행복과 멀었다. 슈만을 너무 잘 알기에 그토록 결혼을 반대했던 클라라 아버지의 예감대로였다. 결혼 전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클라라가 피아노 연습을 시작하면, 슈만은 작곡에 집중할 수 없다며 짜증을 냈다. 클라라는 슈만과의 사이에 7명의 아이를 낳은 후 아이들 교육에 몰두해야 했다. 간간히 피아노 연주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동행한 슈만과 매번 싸웠다. 슈만은 아름다운데다 재능이 뛰어난 아내를 너무 힘들어했다. 미쳐서 강물에 뛰어들기도 했던 그는 매독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는다.
 
말년의 클라라 슈만 모습.

  오늘날 우리가 아름답게 추앙하는 슈만과 클라라의 위대한 사랑이야기는 모든 클라라의 자작극(?)이란 이야기다. 클라라는 슈만이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다. 너무나 현명하고 아름다웠던 여인 클라라는 자신의 철없던 선택과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든 정당화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슈만의 작품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연주하여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 기억하게 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래야만 클라라 자신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브람스의 그 뜨거운 사랑도 거절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정당화되기 때문이었다.
 
  클라라의 짧은 사랑과 그 뒤 평생 고통스러웠을 날들을 생각하자, 난 갑자기 호텔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답답했다. 슈만의 가곡이 나오는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라이프치히 밤거리에 나섰다. 클라라도 밤마다 이 거리를 울며 걸었을 것이다. 〈시인의 사랑〉 중 7번째 노래, ‘난 탄식하지 않으리(Ich
grolle nicht)’가 그렇게 절절할 수 없었다. 그 노래는 사랑의 노래가 아니었다. 평생에 걸친 클라라의 탄식을 예언하는 노래였다. 아, 지구상의 뜨거운 사랑은 죄다 탄식으로 끝난다.



슈만 연가곡 Dichterliebe 7번 Ich grolle nicht (나는 탄식하지 않으리) - 분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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