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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폭포》
- 마종기 -



노르웨이 게이랑에르 피요르드의 "7자매 폭포"

네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치고 엉겨 한 개의 얼굴이 되는 곳을 아느냐. 내 목숨과 네 목숨이 서로 붙자고 한 개의 숨소리만 내는 곳을 아느냐. 우리가 살아온 길과 물을 모두 모으면 사무치게 오래된 흐림 항구가 되느니 가난한 마을 작은 집의 나이 든 아내를 보면 그 긴 여행을 어찌 젖은 과거라고만 부르리. 나도 한때는 정상만 주시하며 뛰었다. 병풍같이 깍아지른 절벽의 바위산들 흔들며, 고개 저으며 흔한 눈물도 흘렸지만 그 슬픔 다 씻어내고 폭포를 덮어가는 무지개, 그 무지개 몇 개 주머니 속에 간직하는 동안 폭포는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네. 영성의 시원한 물로 세례를 받는 이 아침, 어디서 본 듯한 소리 내 혼을 넓게 열어주네

마종기 시인의 12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에 수록된 이 시에 대하여 마종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북유럽의 노르웨이라고 하면, 나는 신비하고 슬픈 <페르 귄트 모음곡>의 작곡가 그리그 (Grieg)와 <인형의 집>을 쓴 근대 희곡의 큰 별 입센, 그리고 표현주의 운동으로 세계 화단의 흐름을 바꾼 <절규>의 뭉크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거기에 거센 파도와 싸우는 강인한 바이킹들의 후예가 내 상상의 틈새를 채웠다. 그러나 몇 해 전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어디를 보아도 깍아지른 듯한 높은 산과 호수와 폭포의 절경,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청정함이었다. 그 사이사이에 오염되지 않은 작은 어촌이나 어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웃 같은 친밀감을 보여주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렇게 곳곳을 지나며 만난 수많은 폭포와, 폭포를 배경으로 번지는 큰 무지개들을 보면서 나는 매일 영성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감동으로 가슴 벅찬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1984년 이후 거의 매년 적어도 한번씩은 드나들고 일 년 또는 몇 개월씩 거주해 온 노르웨이는 나에게는 제 3의 고향이다. 우리를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숨 쉬고 그 속에 안겨서 평화로워지게 하는 곳이다. 노르웨이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즐겨서 본, 모두 다른 형태여서 하나를 접할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폭포가 아마 몇천 개는 되리라. 그것들이 아!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네".



"Grieg: Peer Gynt Suite No.1, Op.46 - 1. Morning Mood" by Berliner Philharmoniker



미국서 홀로 부른 유랑의 노래. [한국초대석] 마종기 시인 -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자의 반 타의 반 조국 떠나 시인과 의사 생활; 등단 50주년 맞아 12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과 에세이 출간
랭보가 시집을 낸 게 19세, 김소월이 '진달래꽃'을 쓴 게 20세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닐 테다. 그러나 랭보와 김소월은 시대에 한 명뿐이니 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시인의 영감이 빛나는 순간 역시 시대 상황과 그의 감각과 이제까지의 경험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일 테니까. (마감을 앞둔 시인들이 이제나 저제나 '영감님(靈感)'을 기다리지만, 정작 이 영감님을 영접했다는 시인을 본 적은 없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견디는 과정은 필요한 법이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읽으면 연륜이 빚어내는 시란 이런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저 먼 타국에서 시인과 의사로 살아온 그의 이력을 들춰볼 때 더 절실히 다가온다.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 중에 말과 글이 다르고, 글과 삶이 다른 이가 태반이지만, 그의 글은 그의 삶만큼이나 겸손하고, 또한 단정하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5월 18일 저녁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그의 등단 50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미국에 오래 머문 터라 제자가 없는 그를 위해 후배 시인들이 마련해준 잔치에는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씨를 비롯한 문학과지성사 1세대와 그의 시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황동규, 정현종 시인, 문정희, 김혜순, 황인숙 등 후배 시인들이 모였다. 축사와 가수 루시드 폴의 공연, 후배시인들의 낭송이 있었고, 마종기 시인은 이병률 시인과 무대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제가 50년 전 문청으로 자라면서 알던 문단은 계파 간에 시기와 적대적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그 사이 젊은 문인들은 어느 선배 시인 밑에 줄을 서야 작품을 팔 수 있는지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문단은 더 이상 부정적 경쟁이 아니라 품위와 겸손과 우정의 시대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 자리가 그걸 보여준다고 봅니다. 저는 한 명의 제자도 없습니다. 한심하게도 시인이란 놈이 20대 후반 고국을 떠나 외국생활로 평생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게 처음 있는 이 모임은 등단 50년 중 최고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몇 줄의 인사에 그의 생애가 담겨 있다.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미국의 중산층으로 안락한 생활을 했던 그가 불 꺼진 밤, 홀로 유랑의 노래를 부른 이유가. 1965년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도중,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명을 한 이유로 고문을 받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게 된 조국.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석 달 뒤 세상을 떠났고, 단돈 50달러를 쥐고 미국에 간 그는 부친의 유고 소식에도 돌아올 수 없었다. 영구귀국은 준비할 때마다 무산됐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조국은 영원히 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다.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시 '3. 대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중에서)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3일 후 광화문 한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얼마 전 낸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과 시작(詩作)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를 손에 쥐고서. 가끔 독자들로부터 문인 인터뷰 기사에서 인용문이 너무 길다는 평을 받는데, 변명을 하자면 이는 책에서 '한 줄도 뺄 만한 구석'을 못 찾았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싣다 보니 길어진 것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그런 고민을 하면서 그를 기다렸다. 이는 한 사람만의 고민은 아닐 터, 후배이자 '마종기 시인을 사랑하는 지하조직' 회원, 이희중 시인은 에세이집 한 켠에 "시집 모든 책장의 귀퉁이를 접어두어야 했다"고 썼다. 에세이의 서문에서 마종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볼품 없는 시일지라도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으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 한 줄은 또한 그의 시를 관통하는 말이다. 우선 그는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그리움을 말한다. 가깝게는 가족부터 멀게는 조국까지. 이 그리움은 동생을 잃은 충격과 설움을 노래한 시집 <이슬의 눈>(1997)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시인은 이 슬픔을 피하지 않고 다시 세상 많은 것을 보듬는다. 절망을 넘어선 초연한 분위기가 시를 감싼다. 좋은 시는 그럴듯한 수사와 문학이론으로 쓰이는 것이 아님을, 그의 시는 보여준다. 누구나 대화를 하다가 분명 쉬운 말인데도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들도 마감을 앞두고 기사를 쓰다 어휘가 턱턱 막힐 때가 있는데, 이때 전문가들의 분석 글이나 비평을 읽고 인용하며 기사를 쓴다. 우리말로 밥 먹듯 글을 쓰는 사람도 이 모양인데, 외국에서 시 쓰는 사람의 답답함은 오죽했을까. "그럼요.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 단어, 표현도 그렇지만 문학 양식도 제가 외국에만 오래 살았기 때문에 부족한 게 많거든요. 문제는 부족한 걸 알면 좋은데, 제 작품이 부족한지 부족하지 않은지 확신이 안 설 때가 있어요. 그런 점들이 저한테는 약점이고 단점이에요. 한 1년 있다가 서울에 와서 '그 시 괜찮더라', 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죠." ''과메기가 뭐지요?'/ '이 근처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말려서 구워 먹으면 술안주에 좋지요.'/갑자기 내가 고국을 떠나 산/ 길고 긴 세월이 비까지 가린다.// 오래 전 중생대의 백악기 지층이라면/ 감포는 경상 누층군 어디쯤인데,/ 화석이 되어 돌 속을 헤엄치는 그 옛날/ 과메기라고 부르던 물고기가 있었던가.' (시 '과메기', <하늘의 맨살> 중에서) 몇 해 전 여행에서 과메기란 말을 처음 듣고 쓴 이 시는 열두 번째 시집에 있다. 그는 "몇 년 전 가수 조영남 씨와 술자리에서 '주꾸미'란 말을 처음 들었다. '이런 사람이 시를 써도 되나?'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건 지엽적인 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시를 썼겠지요." 마종기 시인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한 후배가 말했다. "예전 참여시가 주류일 때, 서정시 쓰셔서 비판 많이 들으신 걸로 아는데, 선생님 생각이 궁금하네." 이는 마종기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하조직'으로 남아야 했던 이유이기도 한데, 그 후배가 새 시집을 읽는다면 그때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터다. 이번 시집에 실린 몇 편의 시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줄게./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야./(…)/ 맞아, 우리 조상은 대식국인에게도 반했고/ 몽고인에게는 백 년간이나 강간당했고/ 중국인의 씨받이, 일본인의 첩살이도 했어./ 그 자식들이 바로 너와 나지. 한 핏줄이라니!/(…)/ 민족을 파는 외판원은 더 이상 만나지 마./ 부끄러운 편이 거짓말의 역사보다는 나은 거야.' (시 '이별', <하늘의 맨살> 중에서) "삶과 사상이 가장 자유로워야 하는 글쟁이는 한 마디로 자유를 찾으러 떠도는 사람인데, 자꾸 민족에 집착을 하는 걸 떠나야 하지 않을까…. 우선 저 자신부터 '내가 고국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는 것으로부터 떠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걱정하면서 이번 시집을 냈어요. 40년 동안 조국을 떠났으면서 왜 민족 걱정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고 욕을 먹겠구나, 생각하면서." "이희중 시인은 마종기 선생님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헌사에서 그렇게 썼죠. 근데 마종기를 사랑하는 지하조직, 이들이 지상에 드러나지 않고 지하조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건 제 생각이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맞지 않았던 거죠."
마지막 열 두 번 째 시집. 새 시집의 앞면을 펼친다. '생각해 보면 이런 몰골로나마 계속 시를 써올 수 있었던 것도 복이 아닐까 싶다. 그간도 내 시를 지켜보아주고 읽어준 당신께 감사한다.' '그간도 내 시를 지켜보아주고…' 시인의 말이 꼭 떠나는 이의 인사말 같다. "사실 이 시집을 끝으로 그만 쓴다는 말을 '시인의 말' 앞에 썼어요. 편집부에서 '정 시집을 내기 싫으면 앞으로 안 내시면 되고, 그걸 밝히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하고 물어서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지웠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이제까지 쓴 시들을 읽다 보니까… 내가 시를 못 쓰더라고. 또 억지로 쓴 것 같은 시도 눈에 보이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 그 자연발생적인 욕구는 오랫동안 썼으니 안 할 수 없겠지만, 그걸 모아서 책을 내는 건 안 하고 싶다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슬퍼지는데요." "나이가 칠십이 넘었으니까 나 자신은 정신이 온전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남들은 나를 보고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정신으로 시를 쓴다는 게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고. 제일 큰 이유는 시집 낸다고 보니까 내가 이정도밖에 안 되나, 절창이 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지요." '나는 내 시가 한국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남기를 바란다'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여기, 당신을 부르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은 소박하지만, 당신에게 닿을 수 없는 간절함이 듣는 이의 가슴의 한 켠을 아리게 하는 노래. 소박한 그 말 덕분에 자꾸 자꾸 다시 듣게 되는 노래. 시련과 슬픔을 누르고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노래는 따뜻하고 겸손하다. 그의 시가 세대를 뛰어 넘어 읊어지는 이유다. [2010-06-03 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 霧 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