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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연못의 수련(睡蓮), 이 어인 일인가 !

_ 소설가 김 훈 _


열려진 꽃 속에 여름의 빛이 들끓고, 그 들끓는 속은
맹렬하게 고요해서 꽃의 열림은 더욱 혼곤한 잠처럼 보였다.


광릉 숲 속 연못에 수련이 피었다.
수련이 피면 여름의 연못은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가득 차고 고요한 순간을 완성한다. 수련은 여름의 꽃이지만 작약, 모란, 달리아, 맨드라미 같은 여름 꽃들의 수다스러움이 없다. 수련은 절정의 순간에서 고요하다. 여름 연못에 수련이 피어나는 사태는 ‘이 어인 일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나의 태어남은 어인 일이고, 수련의 피어남은 어인 일이며, 살아서 눈을 뜨고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체 어인 일인가? 이 질문의 본질은 절박할수록 치매하고 치매할수록 더욱 절박해서 그 치매와 절박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인데 수련은 그 질문 너머에서 핀다. 수련 꽃 핀 여름 연못가에 주저앉은 자와 물 위에 핀 꽃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고, 이 거리를 건너가는 방편은 다만 ‘보인다’라는 한 개의 자동사 이외에는 없지 싶지만, 이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빈곤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쁨이다.

수련은 물 위에 떠서 피지만, 한자로는 물 수(水)가 아니라 잠들 수(睡)를 골라서 수련(睡蓮)이라고 쓴다. 아마도 햇살이 물 위에 퍼져서 수련의 꽃잎이 벌어지기 전인 아침나절에 지어진 이름인 듯싶지만, 꽃잎이 빛을 향해 활짝 벌어지는 대낮에도 물과 빛 사이에서 피는 그 꽃의 중심부는 늘 고요해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깸은 구분되는 것이 아닌데, 이 혼곤한 이름을 지은 사람은 수련이 꽃잎을 오므린 아침나절의 봉우리 속에 자신의 잠을 포갤 수 있었던 놀라운 몽상가였을 것이다.

여름 아침의 연못에서는 수련 뿐 아니라 물도 잠들어 있다. 물이 밤 새 내쉰 숨은 비린 향기와 물안개로 수면 위에 깔려있고, 해를 기다리는 물속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무수한 빛과 색의 입자들을 재우면서 어둡다. 빛과 색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 위에 실려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데, 그 모든 생멸의 과정이 살아있는 동안 뜬 눈에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름의 연못은 인상주의의 낙원이며 지옥이다. 수련을 그린 모네의 화폭은 그 빛과 빛 사이, 색과 색 사이, 순간과 순간 사이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서 거기에서 새로운 빛과 시간의 나라를 열어내는데, 이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지옥 위에 건설된 보이는 것들의 낙원이다.

여름 아침의 수련은 그렇게 다가오는 빛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꽃잎을 접고 잠들어 있다. 수련이 잠들 때, 오므린 봉오리 속에서 빛과 시간과 꽃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자가 말할 수 없지만, 수련의 잠은 자족한 고요의 절정을 이룬다. 그 오므림의 외양은 곤한 잠이고 그 내면은 맹렬한 깨어있음이어서, 수련의 잠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잠이 아니고 수련의 오므림은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오므림이 아니다.

수련은 빛의 세기와 각도에 정확히 반응한다. 그래서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의 숨 막히는 허송세월이 필요하다. 수련은 부지런한 몽상가의 꽃이다. 모네와 수련을 말하는 바슐라르의 글(열화당,『꿈꿀 권리』, 이가림 옮김, 1980 )은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히 저장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클로드 모네는 이른 아침부터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이 되찾아진 젊음, 낮과 밤의 리듬에 대한 그토록 충실한 복종, 새벽의 순간을 알리는 그 정확성, 이것이야말로 수련으로 하여금 인상주의의 꽃이 되도록 하는 이유인 것이다. 수련은 세계의 한 순간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화가는 연못 위에 핀 수련의 순간들을 화폭 위로 번지게 하고 철학가는 화폭 위의 수련으로부터 연못 위의 수련으로 건너간다. 바슐라르의 글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수련의 정확한 복종이 수련의 리듬을 완성시키고, 모네의 화폭에서 이 완성의 순간은 빛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아침 10시가 넘어서 물 위로 햇살이 퍼지면 풀과 나무의 그림자를 드리운 물빛은 더 깊고 더 투명해진다. 물속에 숨어있던 색과 빛과 음영의 잠재태들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그때, 수련은 꽃잎을 연다. 노랑어리연꽃이 열릴 때 여름의 연못은 찬란하다. 수련의 집 안에서 노랑어리연꽃은 작은 꽃에 속하는데 그 꽃의 열림은 얌전하고도 영롱하다. 열려진 꽃 속에 여름의 빛이 들끓고, 그 들끓는 속은 맹렬하게 고요해서 그 꽃의 열림은 더욱 혼곤한 잠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깨어남은 시간에 복종하는 꽃의 리듬일 뿐, 잠도 깨어남도 아닐 것이었다. 어리연꽃의 노랑색은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대낮에 활짝 열린 수련은 날이 흐려지면 꽃잎을 오므리고 해가 다시 나오면 꽃잎을 연다. 그래서 여름의 연못은 빛을 따라서 색들이 열리고 닫히는 꽃밭이다. 여름의 빛이 물풀의 생명을 충동질해서 그 안쪽의 색들을 피어나게 한다. 날이 저물어, 대기 중의 빛이 모두 스러지면 수련은 야물게도 꽃잎을 오므리고 밤을 맞는데, 그때 여름 연못가의 하루는 돌이킬 수 없이 다 지나간 것이다.

[김훈 에세이집『자전거여행 2』, 생각의나무, 2004]
옮긴이 : Esso





music : Water Lillies - Kevin Kern


= Esso =

  • ?
    김상각 2017.08.19 23:30
    읽고 또 읽고 생각에 잠겨 본다 ....
  • ?
    박혜자 2017.08.21 09:39
    이 어인 일이십니까??
    놀라고 놀랍습니다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셨습니까??

    반갑고 반갑습니다
    이제는 촣은 글 좋은 소식 올려주십시요
    우리 모두의 정점이신 귀하의 솜씨로 인하여 모두가
    기쁨의 나날들을 보내게 하시옵소서

    이젠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간간히 생명수 처럼 맑은
    숨을 쉴수 있도록 멋지고 뜻 깊은 글, 영상을 보여주십시요
    그 것을 봄으로 인해 건강하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감사합니다............
  • ?
    김혜숙 2017.08.26 00:36
    며칠 분주한 일에 쪼들려 9홈을 열 겨를이 없다가 오늘 아침 찾아오니 가슴 뿌듯하게 해주는 이 반가움!
    수련의 꽃잎이 열린 것처럼 오셨네요.
    Bra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