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과 소 그림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그야말로 한 눈에 삘이 꽂힌 맥타가트는
이중섭을 직접 만나길 원했다.
이중섭의 친구인 최태응의 중재로 자리를 같이 한 자리에서
맥타가트는 "당신의 그림은 훌륭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황소는
꼭 스페인 투우와 같이 무섭더군요."라고 평을 했다.
이에 이중섭은
"뭐요??? 투우라고?? 내가 그린 소는 그런, 싸우는 소가 아니고
착하고 고생하는 소, 소중에서도 한국의 소란 말이우다!!!"
화가 난 이 중섭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고
몇날 몇일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제까지 보고 그리고 보고 그린 소를 스페인 투우에 비교하다니
내 그림이 그렇게 보이면 나는 다 틀렸어..."라며 절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인전이 열리고
<대구매일신문>에 맥타가트가 이중섭의 그림을
호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맥타가트가 예약하고 그림을 사려고 할 때
이중섭은 단호하게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태응을 통해 몰래 사 갔다는 일화가 있다.
떠 받으려는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흰 소
종이에 유채 30×41.7cm 1953~4년 무렵
1953-54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검은 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로 여겨진다.
특히 머리와 꼬리 부분의 표현이 강하다.
초기의 정겹던 소의 모습은 사라지고 거칠게 변화된 그림.
이외에도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떠받으려는 소> 등이 있다.
초기의 황소그림은 민족적이고 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쟁과 가족의 이별, 그리고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개인적인 아픔을 표현하는 자전적인 소재로 변화된 것 같다.
그러므로 이 <흰 소>는 이중섭의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
소
29x40.3cm, 1956년 무렵
소
싸우는 소
싸우는 소
붉은색이 많이 들어간 이 그림들은 이중섭이 북쪽의 정체성인 붉은색의 강요에 영향을 받은듯..창작의 표현이 아무래도 규제가 심한 북한에서 못버티고 남한으로 넘어온 건 자유분방한 그의 예능적 표현을 갈구했기 때문은 아닐까?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노을앞에서 울부짖는 소
용을 쓰는 흰 소
흰 소
소와 어린이
어린아이와 있는 소가 거칠어 보이지만 아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소와 어린 아이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1942년 8월 10일
여인과 소와 새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14×9cm
1941년 5월 29일자 소인, 일본에 있는 아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에 그려진 그림이다. 여인은 일본인 아내 남덕(마사코의 한국 이름, 이중섭이 지어준 이름이다)일게다. 사랑스런운 눈길을 여인에게 보내는 소는 이중섭 자신이 아닐런지..
소와 여인
유채 크기 모름 1940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소와 비둘기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1954년
이중섭의 또 다른 소재인 새와 게가 한자리에 모여있다. 게는 원산의 바닷가에서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단골 소재가 된다.
소와 남자
종이에 잉크 14×9cm 1942년 8월 30
소에 대한 경의 종이에 잉크 9×14cm 1942년 8월 28일
사람과 소와 말
이중섭은 소를, 특히 황소를 많이 그렸는데 초기에는 민족적이고 신화적인 성향을 보인다. 이 그림은 1941년에 엽서에 그린 그림이다. 망아지에 탄 두 남자 중 한 남자를 소가 뿔로 쳐서 밀어내려고 하자 다른 한 남자가 만족스러워하며 소를 쓰다듬는 광경이 담겨 있는 그림으로 소의 모습이 왠지 정겹고 유머러스하다. 색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을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
물고기를 들이받는 소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10.5×25.7cm. 1954년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 가슴 환히 헤치다... 당시 이 시를 본 이중섭의 조카가 "삼촌 시도 써요?" 하니까 이중섭 왈 "그냥 소가 말한 걸 옮겨적었지.." 한다. 조카가 웃으며 "소가 조선말을 참 잘 하네요" 하니까 이중섭은 "조선 소니까.."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근데 소눈이 예전 같지가 않아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흐려졌어...
소는 이중섭에게 운명적인 오브제였던 것이다.
재료 및 크기 모름 원작 망실 1940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소묘 종이에 연필 26.6×23.5Cm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개인소장
서 있는 소
재료 및 크기 모름 1940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원작망실 1940년 6월 22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그림
반우반어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1940년 말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1941년 3월 30일
말 탄 남자를 뿔로 쳐내는 소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1941년 6월 13일
뿔로 쳐내는 소나 소뿔에 받친 사람이나 행복해 보인다.
사람을 치는 소 종이에 잉크 14×9cm
1942년 8월 8일
소가 사람을 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와 행복하게 어울어진 모습으로 보인다.
연못이 있는 풍경 유채 크기 모름 1941년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전 출품
자화상 종이에 연필로 그리고 색연필로 서명
48.5×31cm
1955년 개인소장
이중섭 (1916년 4월 10일~1956년 9월 6일)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경력 : 1950년 원산 신미술가협회 결성, 회장 취임 1952년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 입단 1955년 미도파화랑 개인전
수상 : 1937년 자유미협전 태양상
데뷔 :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특이사항 : 자유분방, 격렬한 화풍
이중섭은 소를 그리기 위해 하루종일 들에 나가 소를 관찰했다고 한다.
고향인 오산에서 시작된 소에 대한 탐구는,
사업을 하는 형을 따라 생활하게된 원산에서도 이어진다.
"원산 송도원 부근의 농부들이, 날마다 나타나서
하루 해가 저물도록 소를 보고 있던 중섭을
처음에는 소 도둑인 줄 알고 고발한 일도 있었대요."
"어떤 농부는 그를 미친놈이라고 쫓기도 하고
아마도 소 도둑이거나, 소 백정으로 소에 미쳐서
소 옆에만 나와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대요."
이렇게 그 당시의 이중섭의 체험을 말하는 원산 시대의 증인도 있다.
사물은 그것을 객체로 대하는 동안
곧 혐오감이 생기거나 싫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물과 사물 관계자는 절연되는 경우가있다.
그 절연을 어떤 인식이나 사랑,지혜를 통해서 극복하고
사물을 자기화하는 것이
가장 깊은 철학이며 가장 좋은 문학이고 예술인 것이다.
이중섭은 그런 일을 해낸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란 불가능하다.
- 이중섭 평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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