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부탁을 받은 진양대군(수양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여기에 세종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좌부승지 황수신(黃守身)은 ‘궁녀 담치기 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다. 수사진의 면면만 봐도 이 수사진이 ‘어떤 목적’으로 꾸려졌는지 한눈에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단 애들을 모아 놔야 겠는데….” “그럼 의금부에다 자리 좀 마련하라고 할까?” “미쳤냐? 100명이 넘어가는 애들을 다 의금부에 넣었다가 나중에 어쩌려고? 최대한 은밀하게 일 추진하란 말 못 들었어?” “그럼 어쩌라구?” “일단은 경복궁에다 다 때려 넣어. 거기서 심문한다.”
이리하여 수양대군과 수사진들은 궁녀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용의자들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네가 고미(古未)를 꼬셔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 “대…대군마님, 저는 마누라 한명만 바라보는….” “야야, 그게 말이 돼?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 가끔 고기도 먹고, 미나리도 먹고 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어쭈, 이제 좀 말이 통하는데?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쉽게 가자. 네가 궁녀 꼬셨지?” “아…아닙니다!” “이 자식이, 너 고기도 먹고 미나리도 먹고 싶다면서?” “아니…고기는 먹고 싶지만….” “안되겠어. 이 자식 의금부로 보내! 가서 스페셜 코스로 한번 돌려라!”
세종의 왕자들은 경복궁에서 1차 조사를 벌여 혐의가 의심되는 인물들은 의금부로 보내고, 알리바이가 있거나 범행용의점이 없는 인물들은 방면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용의자로 분류되었던 인물들은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당시의 기록을 잠깐 살펴보면,
(상략)이 초사에 걸려든 자가 무려 백여 명이 되는 것을 경복궁(景福宮) 밀실(密室)에 가두고서, 진양대군 이유, 광평대군 이여, 금성대군 이유와 좌부승지 황수신(黃守身)을 명하여 함께 문초하게 하여, 죄 없는 자는 놓아 보내고 죄 있는 자를 의금부에 내리었는데, 몇 백 번이나 매를 때려도 승복(承服)하지 않고 또 압슬형(壓膝刑)까지 하였다. 대개 임금의 생각에는 궁인이 혹 담을 넘어 외인과 사통하지나 않았나 하였기 때문에 그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으나 겨울에서 봄까지 가도 마침내 그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6년 10월 14일의 기록 중 발췌
두들겨 패고, 압슬형(壓膝刑 : 고문의 일종으로 죄인을 기둥에 묶은 다음 사금파리를 깔아 놓은 자리에 무릎을 꿇게 하고 그 위에 압슬기나 무거운 돌을 얹어서 고문하는 방법)까지 가했으나 끝내 범인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궁녀 고미(古未)는 단순히 담만 뛰어 넘은 것일까? 지나가는 소가 웃을 소리였다.
“휴, 고모부를 고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 “고모도 안됐지, 자기 시녀랑 놀아나는 남편을 계속 봐야 한다니….” “어쩌겠어? 다 팔잔데.”
그랬다. 당시 궁녀 고미와 놀아난 사람은 숙근옹주(淑謹翁主)의 남편 되는 권공(權恭)이었다. 아니 권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궁녀를 꼬실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담치기라니, 이럴 정도의 남자라면 종친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문승유 사건이 벌써 터진 상황인데다가, 와이프의 시녀와 눈이 맞은 부마라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 방법이 ‘담치기’라니, 세종으로서는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였다.
결국 이 사건은 범인을 잡아내지 못한 걸로 일단락되게 된다.
범털과 깃털의 차이는 궁녀와의 스캔들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궁녀들은 종친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내시와 별감 등의 경우는 ‘자발적 연애’라는 개념이 성립되었지만, 종친들의 경우는 ‘비자발적 연애’ 혹은 ‘강압이 가미된 연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론 ‘왕의 여자’였던 궁녀! 그러나 알고 보면, 수많은 남성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원래 금단의 열매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이 아니던가? 목숨을 내 걸고, 혹은 지위를 내 걸고 궁녀들에게 덤벼들었던 수많은 불나방들! 그들이 있었기에 궁녀들은 연애를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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