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열린게시판 > 열린게시판
 
조회 수 44332 추천 수 4262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extra_vars1 ||||||||||||||||||||||||
extra_vars2 ||||||||||||||||||||||||||||||||||||||||||||||||||||||||||||||||||||||||||||||||||||




    내가 좋아하는 산문 (2) 윤오영의 수필 "비원(秘苑)의 가을"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가던 나는 맞은편에서 오는 금아(琴兒)와 만났다. "마침 잘 만났군" "혼자서 비원엘 가던 길이야?" 금아의 말이다. 두 그림자는 드디어 비원으로 옮겨졌다. 각기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다. 석양은 한 자쯤 남아 있었다. 낙엽을 밟으며 누릇누릇한 수림 사이로, 약간 남아서 선연한 단풍을 본다. 만추의 빛이다. 저물어 가는 가을. 비원 안에는 사람이 적었다. 낙엽을 깔고 앉으니 푹신하고 들어간다. 한 움큼 쥐어보며, "이효석의 산이란 참 좋은 작품이었군!" 금아도 말없이 낙엽을 쥐어 본다. 언덕길을 내려갈 때 앞서 가는 남녀 두 학생이 있었다. 우리를 돌아보며 "할아버지 이 꽃 좀 보세요. 봄날 같지요"하기에 옆을 보니 양지편으로 뻗친 가지에 개나리꽃이 노랗게 맺혀 있었다. 손바닥을 꽃 밑에 대고 들여다본다. 갑자기 풀린 날씨에 잠시 핀 철 아닌 꽃이다. 초승달 같은 이 꽃, 보는 사람은 극히 적다. 다시 숲 속에 앉았다. 둘의 이야기는 지나간 옛날을 더듬었다. 창범이, 남이, 상빈이, 영빈이, 영범이, 지금은 다 어디들 있는고, 둘은 죽고 하나는 병들고 하나는 알 길이 없다. 어렸을 때 어두운 거리,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울분을 터뜨리고 포부와 재주를 다투던 그리운 얼굴들이다. 금아는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항상 고독을 느끼는 다감한 사람이다. "이렇게 느끼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대답 대신 호탕하게 웃었다. <서상기(西床記) 서(序)>에 김성탄(金聖嘆)의 말이 걸작이다. "내가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나지라고 청했기에 무단히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며, 이왕 태어났으면 길이 머물러나 두거나, 왜 또 잠시도 못 머무르게 그렇게 빨리 가게하며, 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게 하면서 그 동안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은 왜 또 이렇게 다감하게 했느냐고 조물주에게 따졌더니, 그 대답이 난들 어찌하리오, 그렇게 아니 할 수가 있다면 조물주가 아닌 걸, 당신들이 제각각 나라고 하면, 어느 것이 진짜 나요" 하더라는 것이다. 이 또한 성탄대로의 실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옥류천의 물소리는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고궁도 아니다. 두 사람을 위해서 잠시 베푼 만추의 한 폭이다. 이윽고 금아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가 있을까." 나는, “앞으로 그리 길지 못한 가을이나마 또 몇 번이나 이렇게 둘이 한가하게 즐길 수 있겠소" 하고 웃었다. 그리고 소동파의 글을 외었다. "밤에 달이 밝기에 뒷산 절에 올라갔다. 상인(上人-僧)도 마침 마루에서 달을 보고 있다가 반가워한다. 뜰 앞에 달빛이 고여 바다 같다. 마당가의 대나무 그림자가 어른어른 물에 뜬 마름 같다. 달빛은 어느 때나 있고 대나무 그림자도 어디나 있지만, 이 밤에 우리 둘같이 한가한 사람이 있기가 적다." 이 전편 몇 줄 안 되는 글이지만 나는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적벽부>보다 높이 평가한다. 百年閒日不多時! (인생 한가한 날은 많지가 않다.) 인생 백년을 짧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한가한 시간이란 다시 짧다. 깊은 산 고요한 절에 숨어 살아도 우수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요, 밝은 창 고요한 책상머리에 단정히 앉았어도 명리와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다. 심심해서 신문광고를 들고 누웠어도 시비와 울화를 안고 있으면 분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요, 피로와 권태가 이미 한가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생활에 쫓기고 세태에 휩쓸려 한가할 겨를이 없음에서랴. 세월의 빠른 것을 한탄하고 슬퍼함은 인간 통유의 정이지만 기다림이 있으면 일각이 삼추 같고, 괴로움이 있으면 하루가 십 년이다. 옥중에서 지루한 세월을 저주하는 사람, 월급날을 손꼽아 재촉하며 초조한 사람도 있다. 진실로 한가한 사람이란 몇이나 되는가. 도연명 같은 전원시인을 한일(閒逸)이라 하지만, "채국동리하(採菊東離下) 유연견남산 (悠然見南山)"를 읊어 본 시간은 그의 일생에서도 반드시 많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 :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 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1974년) [著者 略歷] 윤오영 (尹五榮, 1907--1976) 서울 출생, 號 치옹(痴翁), 양정고보 졸, 보성고등학교에서 교편 20년 "현대문학"에 수필 및 문학논문 발표 (1959년) 著 書 : 고독의 반추 (1974년) / 수필문학 입문 (1975년) / 한국수필정선 (1976년) 방망이 깎던 노인 (1976년) / 동매실 산고 (연재 수필) 등 다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685 즐겁고 풍요로운 한가위 맞이하세요 1 김태환 2007.09.23 44478
10684 ♣ HappyWeek-419 4 김인중 2004.05.08 44455
10683 호로비츠의 고별 연주 4 허영옥 2007.04.28 44398
» 내가 좋아하는 산문 (2) - 윤오영의 수필 "비원(秘苑)의 가을" 2 김정섭 2008.11.23 44332
10681 馬光洙 - 성 에너지의 원초적 발산 11 명남진 2008.03.21 44322
10680 아범아 ! 내 아들아 ! (어버이날을 맞아 생각나는 이야기) 3 김정섭 2008.05.07 43962
10679 영화 속의 감명깊은 클래식들 2 엄근용 2007.04.11 43944
10678 최근에 읽은 책에서 - 까뮈: 로망스 (Camus: A Romance) 3 김혜숙 2010.07.07 43066
10677 반 고흐의 <여름> 민병훈 2012.08.10 42851
10676 아름다운 스페인 건축 3 민병훈 2011.10.16 42650
10675 나이는 꿈을 막을 수 없다 8 안장훈 2008.10.27 40243
10674 팝 싱어들의 'Amazing Grace' - Judy Collins / LeAnn Rimes / Charotte Church [동영상] 7 이태식 2006.12.31 39993
10673 ♣ HappyWeek No.304 2 김인중 2003.02.02 39851
10672 설날의 모든것 4 김정섭 2008.02.06 39689
10671 미셸 오바마 뿔났다 !!! / 섹시 미인 태국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 5 이완규 2012.12.24 39227
10670 [re] Franz Lehar (1870~1948) - 'Gold and Silver' Waltz, Op.79 (레하르 '금과 은' 왈츠) 2 이태식 2007.04.10 37928
10669 Swan Lake 와 강성은의 시 "차와 여자" 1 홍순진 2012.11.19 37252
10668 씨야 Maroc 紀行 (3) 8 김창현 2010.10.07 36185
10667 우리의 삶은 한권의 책이다. 2 김선옥 2007.11.06 35049
10666 조수미의 노래 모음 4 최성열 2003.11.23 3477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37 Next
/ 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