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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01:57

씨야 Maroc 紀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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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san Tower, Rabat, Maroc


씨야 Maroc 紀行 (3)

버스는 중(中)아틀라스 산맥을 왼편으로 끼고 1,200년째 등불이 꺼지지 않는 미로(迷路)의 도시 페스(Fez)로 향했다. 사실 Maroc에 온 이유가 이 페스 하나 보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서 내가 빠지지 않고 보는 TV프로 가운데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첫 장면이 이 페스의 가죽 다루는 무두질(Tannery) 공방이었다. 요즘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지만.

14,000여 채의 찬란한 옛건물을 거느리고 이세상에서 유일하게 14세기로 돌아가 살수 있는곳, 튀니지의 자이툰대학, 이집트의 알아즈대학과 함께 이 메디나 안에역사상 아랍세계 3대 대학의 하나인 카라위인(karaouiyine)대학이 아직도 모스크와 도서관을 거느리고 1,151년 동안 건재하지 않는가 !

현대 기독교문명이 아무리 호기를 부려도 그리스-로마문화를 보존, 발전시켜 그들에게 전수해준게 누군가? 아랍문명 아닌가. 또 중국으로부터 종이, 화약, 나침반을 가져다가 서구에 전해준 사람들도 이 아랍 사람들이다. 종이를 가져다가 성경을 찍어 내므로 사제들이 독점하던 지식을 만인의 자산으로 확대하고 계몽주의가 오고 산업화가 뒤따라 오늘날 기독교문명이 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 않는가. 비록 중국인들이 장난감으로만 쓰던 화약을 개량하여 대포를 만들어 성(城)과 기사도(Cheval!erie)문화를 허물어 버린것은 그들, 서구인들의 지혜였을 망정. 중세 이후 이슬람의 지리학, 천문학, 수학, 의학의 전문서적이 유럽의 대학교재로 쓰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서구의 의학발전은 그 모체가 이슬람이다.
알 라지(Al-Razi), 알비카시스(Albicassis), 아비케나(Avicenna).... 이 이슬람 의사들은 서구의학의 할아버지들이다. 알 라지는 의학대전 20권을 집필했음은 물론 조건반사나 천연두, 홍역에 대해 탁월한 연구를 남겼고 알비카시스는 알콜을 소독제로 최초로 쓴 의사다. 그 뿐인가. 충치치료에 금박충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고 수술에서 소작법을 최초로 도입했고 또 동물의 뼈로 인공치아를 만들어 빠진 잇빨을 대치했던 의사다. 아비케나는 ‘의학전범’을 집필했고 폐결핵의 전염성을 최초로 주장한 의사고.

또 현대병원 의료시스템의 기원도 아랍이다. 나병환자격리수용, 환자복, 의약분업, 전문의제도, 회진제도 등 이 모든것을 최초로 시행한 곳은 아랍 이다. 오늘날 안과가 스페인이 세계서 가장 앞서는 것도 몇백년전 세비야서 시술했던 알 가페우이(Al-Gafeoui)가 있어서가 아닌가.

“칠십노인이 버스에 매달려 뭘 볼게 있다고 Maroc 까지”라고 비웃지 말라. 나는 지금 심각하게 서구문명의 모향(母鄕)을 찿아 산초도 없이 동끼호테 처럼 나선 길이다. 화석도 아니고 지난 12세기 동안 시간이 멈추어 버린 도시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오순도순 정겹게 살고 있는 세계유일한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땅은 기름졌고 마치 호박 비슷한 멜런밭이 이어지는데 농부들은 구경을 할 수가 없다. 아마 라마단 기간이라 그런 모양. 특히 어젯밤은 한달 라마단 기간동안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가 있었던 시간이니 말해 무엇하랴. 중간 휴게소에 들러도 한사람 서서 음료수나 팔 정도.

이 탕헤르와 페스 사이가 Maroc역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알카세르 키비르(Alcacer Quibir) 전투현장이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시간은 거슬러 올라 432년전, 스물네살 먹은 철없는 포르투갈 세바스티앙(Sebastian 1554-1578)왕이 17만대군을 이끌고 원정왔다가 절반이 전사하고 절반은 터키의 지원을 받은 Maroc 군대에게 사로 잡혔다.
세살에 할아버지 주앙 3세의 뒤를 이어 등극했으니 머리에 피나 말랐으랴. 젖내나는 왕을 옹립해 놓고 섭정문제로 포르투갈은 또 얼마나 내홍을 겪었던가. 처음엔 주앙 3세의 왕비 카타리나가 나섰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여동생. 포르투갈 온국민이 이 타지역 카스티아 출신 왕비의 포르투갈 통치를 반대했다. 결국 5년 논란을 끌다가 주앙 3세의 유일한 동생인 엔리케 추기경이 섭정을 맡아 세바스티앙이 성년 될때까지 이르렀다.
주앙 1세부터 포르투갈의 아비스(Avis)왕조가 시작된다. 그는 아비스 수도원장으로 있다가 왕 페르난도가 죽고 왕위계승 문제가 혼란에 빠진 걸 수습하고 왕으로 추대 되었다.
이 주앙 1세부터 포르투갈 역사로 볼때는 큰 전성기가 시작된다. 그걸 그사람들은 대항해시대라고 부르지만 나는 포르투갈의 저주 받아야할 패륜사의 시작으로 본다. 아프리카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사람장사에 나서고....결국 어둡고 무섭고
악랄하고 기독교문명을 바탕으로 한 긴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가 여기서 시작한다.

현대인들이 흔히 쓰는 말에 좀비(Zombie)라는 어휘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아이티 부두교에서 나온 말이라고 적혀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다가 팔아먹은 악행(惡行)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걸어다니는 시체, 강시(강屍)를 좀비라고 일컷지 않았는가! 캄캄한 선실 밑바닥에 포개어 싣고 길고 긴 항해, 고통을 호소하면 마취성분이 강한 풀잎이나 던져주고 뭍에 내려서면 낯모를 유럽이나 브라질 땅. 채찍질 맞아가며 일하고 가축이나 먹을 음식을 얻어 먹고 멍하니
걸어다니는 시체, 그게 좀비 아니었던가 !
그 패륜의 원조가 이 포르투갈 녀석들이다. 지금은 사깃꾼이 참 많은 나라고. 누가 알랴. 그래서 1755년 이 포르투갈에 전대미문 진도8의 대지진이 내리때렸는지. 세바스티앙 왕 당시 인구 백몇만의 나라가 그래서 Maroc땅에서 17만이나 천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 철딱서니없는 세바스티앙 왕이 兵士 17萬만 잃었나? 아니다. 제목숨 까지 바쳤다. 포르투갈사에는 하나의 미신이 있는데 이 세바스티앙 왕이 Maroc의 이곳 알카세르 키비르(Alcacer Quibir)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바스티앙 위로 일곱왕의 세월이 워낙 빛났기에 도저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왕의 전사(戰死)를 현실로 받아 들이지 못했다.
곧이어 스페인 펠리페2세의 포르투갈 통치 60년이 시작되고 이 믿기싫은 미신은 100년이 지속되었다는게 엄연한 역사의 기록이다.



페즈에 있는 한 왕궁 / The Royal Palace, Fez, Maroc


페스의 첫 입구에 삐까 번쩍한 왕궁이 먼저 나타났다. 왕궁이 Maroc 전역에 여덟군데라고 했던가? 참 안어울린다. 내눈에는 그 땅, 산천과 영 언벨런스다. 모든게 쇠락하고 낡았는데 어찌 왕궁만 이리 요란할까?

오늘날 페스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오래된 메디나는 서기 809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옛 페스’라는 뜻의 페스 알 발리(Fez-al-Bali), 두번째 구역은 1276년부터 지어진 새로운 페스로 메디나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페스 제디드(Fez Jedid)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오랜 거주구역인 멜라(Mellah)도 이 안에 있다. 나머지 하나는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어진 빌 누벨(Ville Nouvelle). 알제리에서 뼈아픈 경험을 한 20세기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이 페스 메디나를 무리하게 현대화하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지은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이다.

또 옛 페스안에는 안달루스와 카라위인 구역이 있다. 스페인 알달루스에 살다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위해 페스속에 안달루스구역을 만들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예술적 재능을 쏟아부어 페스의 건축물들을 그리도 아름답게 장식했다. 또 9세기 종교박해를 피해 튀니지 카라위인을 떠난 부유한 상인의 딸, 파티마가 유산을 몽땅 털어 설립한게 카라위인 대학이고 여기를 카라위인 구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꼬불 꼬불 좁은 골목속에 있는 대문이 여염집 같은 식당에 안내되어 점심을 먹었다.
벽 한쪽 옆에는 Maroc 특유의 악기와 장신구들로 예쁘게 장식을 해놓았다.

메뉴는 베르베르족의 대표 음식 이라는 꾸스꾸스(couscous). semolina 가루를 거칠게 쳐서 알갱이로 만든 것인데 마치 좁쌀같고 맛도 엇비슷하게 느꼈다. 거기다가 야채를 듬성듬성 썰어넣고 닭고기와 소고기를넣고 찐것, 맛은 아주 좋았다. 곁들여 나온 빵도 특이해서 많이 남기에 좀 싸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OK해서 싸왔다.
결국 배가 불러 먹을 겨를이 없어 이틀뒤 버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Maroc의 명물이라는 타진(Tagine)요리나 말리카의 외조부가 그렇게 좋아
했다는 비둘기고기에 포도와 편도를 넣어 만들었다는 베르베르족들의 일품요리
파스티야는 구경도 못하고 갈 모양이다. 낙타고기도 그렇게 맛이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단체관광단을 쭐쭐 따라 다니는 주제에.

우리는 마냥 하늘만 처다보는 구두딲이가 안돼서 적선 삼아 1 유로씩 주고 구두를 닦고 본격적인 미로탐험에 나섰다. 키가 자그마하고 터번에 흰도포 차림, 한국말 ‘왼쪽’ ‘오른쪽’ ‘똥(당나귀)’을 외치는 현지 가이드의 인솔로.
미로는 골목수만 근 9천몇백개, 총연장 3백몇십Km라나.
대부분의 가게는 라마단이라고 문을 닫고 길에는 널부러져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눈만 마주치면 그들은 힘없이 '꼬레아'라고 말하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 진심어린 환영을 했다.
골목마다 손벌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늙은 할머니가 손을 벌리며 땅만 내려다 보기에 한푼 건냈더니 받지를 않는다.
눈에 잘 띠는 지전(紙錢)인데도. 이상했다.
순간 옆에 섰던 사람들이 몸짓으로 맹인임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노파의 손에
쥐여주었더니 주변 사람들이 Merci를 연발한다.
입구의 으리으리한 왕궁을 생각하니 내가슴에는 분노 같은게 치밀어 올랐다.

나귀가 지나갔다. ‘발락 발락(조심 하세요, 조심)’을 외치는 어린 마부가 귀엽다.
처음들린 공방, 천년의 세월을 담아내는 장인의 손놀림은 일정했고 만들어 놓은
접시등 공예품은 입이 벌어지게 문양은 화려하고 정교했다. 옷과 피륙가게를 지나
비석가게 앞에서 우리는 발길을 멈췄다. 멀리서 보니 아랍 특유의 젤리즈(Jellij)란 큰 타일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 자세히보니 석판이다. 우와 세상에 이렇게 넓덕한 큰 비석 아래 묻히다니. 아마 큰부자들이 사가는가 보다. 동그랗게 글자를 두르고 그안에 책을 그려넣고 책안에도 글씨가 빼곡이 적혔다. 밑은 횡하니 비워놓은걸 보니 우리네처럼 이름이나 살아온 내력을 쓰는 자리인지. Maroc 사람들은 아라비아어의 사투리인 다리자(Darija)란 언어와 프랑스어를 쓴다.
아마 다리자어로 그들의 꾸란 구절을 적어 놓았거나 알라신을 경배하는 것 아닐까?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우리같은 라마단이란게 뭔지 아는지 모르는지 홍문천지도 분간 못하고 찾아오는 관광객을 배려해서 가게는 듬성듬성 열려있다.
발길은 가이드를 따라 숄과 옷가게 앞을 지나고 끝이 뾰죽한 Maroc 전통 신발
바브슈 가게 앞도 지난다. 좁은 골목 마주치는 나귀나 엑조틱한 가게 모습,우리가 호주머니를 열기에는 너무 저먼 타인들의 상품이었다.
차라리 가게 문닫고 가서 기도나 열심히 하시면 내가 덜 미안할 정도. 이 메디나 안에는 외국인은 거의 없고 탕헤르나 마라케시처럼 관광객에 명줄 걸지도 않는 그들이 25만명이나 거주한다니, 아이구 답답해. 집안만 이라도 빛이 잘들어 오는지 모르겠다.




마록의 젊은 여인들 / 마록 태생의 사진작가 Bruno Barbey의 작품


드디어 카라위인 대학 앞에 섰다. 서기 859년에 완공되어 현존 세계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 부속 모스크에는 라마단이라 모두 기도에 열심이어서 감히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주저되는 엄숙만 흘렀다. 위를 쳐다 보아야 내 똑딱이 카메라로는 지붕이 영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길은 좁았다. 14세기에 벌써 3만의 장서를 자랑하고 1만필의 필사본 두루마리를 소장했다는 곳. 아랍을 넘어서서 인류역사상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지성의 본산이고 학문의 전당이었다.

이 두서없는 내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아는가? 유럽에 전해져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숫자 0의 개념을 포함한 아라비아숫자가 이 카라위인 대학서 수학한 석학(碩學) 제르베르 도리야크(Gerbert d'Aurillac)가 전한 것이란 사실을 ! 그는 이 카라위인대학서 배운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계산기, 즉 서양식 주판을 만든 사람이고 사실상 오늘날 컴퓨터는 이 0의 개념 정립(定立)에서 출발한다. 카라위인대학은 인도의 십진법개념을 들여와 널리 보급시킨 것이다.
이 제르베르 도리야크는 원래 고아였다. 프랑스 오베르뉴지방 한 수도원 앞에 버려져 그 수도원에서 자랐다. 967년 수도원을 방문했던 바르셀로나 변경의 보렐 백작의 눈에 띄여 보살핌을 받고 공부를 했다. 나중에 꼬르도바의 석학 아톤에게 소개한 사람도 이 보렐백작이다. 청년 수도사 제르베르의 학문적 목마름을 주목한 것이다.
아톤으로 부터 수학, 천문학, 논리학, 음악, 의학, 웅변술등 아라비아 학문을 습득했다. 그래서 그는 카라위인 대학 까지 유학을 왔었다. 뒤에 신성로마제국 왕자의 師父도 지냈고 대주교를 거쳐 54세에 실베스테르2세(Silvester II)란 이름으로 139대 교황을 4년간(서기 999년-1003년) 지낸 인물이다.

교황으로서 성직매매와 족벌주의 타파에 앞장선 개혁파 였지만 학자로서도 <원반이론> <기하학에 대하여><理性的인것과 理性의 사용에 대하여>란 주옥 같은 저술을 남겼음은 물론 특히 천문학의 <아스트롤라베>論을 썼다. 아스트롤라베란 일종의 천체 관측이론으로 시각이나 방위도 측정할수있어 서유럽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널리 유용하게 쓰였다. 대학자이면서도 증기식 오르간까지 발명한 천재이다.

이 기행문 1회에서 쓴 것처럼 아랍이 자랑하는 대석학 이븐 루쉬드도 이 대학에
석좌했고 이븐 칼둔도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븐 루쉬드(Ibn Rushd1126-1198)는 서구사회에는 아베로에스(Averroes)로 더 잘 알려진 학자다. 앞서 내가 쓴대로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저술만 26권. 태어난 곳은 스페인 코르도바. 집안은 법학자 가문이지만 그 자신은 신학, 의학, 철학, 법학등 다방면에 깊은 교양을 쌓았으며 세비야에서는 법관도 역임했고 Maroc에서 온 알 모하드 왕조때는 시의(侍醫)까지 지내기도.그러나 스페인서는 정통파 신학자들과 마찰을 빚어 Maroc으로 건너왔다.
장년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술에 주해(註解)를 완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작업은 유럽 르네상스에도 크게 공헌 했으며 <神曲>을 쓴 단테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철학사상 특기할만한 점은 자기보다 후학이지만 대신학자
였던 알 가잘리의 <철학자의 부조리 Tahfut Al-Falasifa>를 심오한 해석학적 통찰을 기반으로 비판한 점이다. <不條理의 不條理 Tahafut Al-Tahafut>란 제목으로.또 아랍학의 태두인 후라니(Hourani)가 쓴 글에 보면, 그는 ‘철학은 식자층(Khassa)을 위해 존재하고 일반 대중(Amma)은 꾸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지론을 폈는데 이는 불교의 근기론(根機論 Indriya)과 무척 유사 하구나 나혼자 생각했다.

이븐 칼둔(Ibn Khaldun 1332-1406)은 오늘날 한국의 중동학학자들도 그에 관한 논문을 쓰는 대 역사학자다. ‘무깟디마’(Muquaddimah 역사서설)는 정치변동에 관한 이론인데 토인비도 그의 학설을 <역사의 연구>에 도입했다. 그는 왕권과 왕조의 힘은 특정집단과 그들이 지닌 아싸비아(Asabiyah)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싸비아란 개념은 부족의 연대의식을 넘어선 사회적 연대의식을 말한다. 이 이론의 특이한점은 한민족이 왕권확대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야만성’을 꼽고 있는점이다. 우유부단과 어줍잖은 자비는 통치자에게 큰문제를 안겨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선조들은 원래 아라비아 반도 남부출신. 세비야에 정착해서 살았으나 스페인 북부의 기독교세력이 남하하여 세력을 확장하자 다시 튀니지로 옮긴다. 그의 증조부도 튀니지 궁정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으나 군주의 미움을 받고 살해된다. 부친도 관료와 학문의 길을 번갈아 택하고 칼둔마져 이나라 저나라 떠돌며 선대들과 똑 같은 길을 걷는다. 이집트의 맘루크(Mamluk) 탄의 신임을 얻고 궁정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튀니지에 남아있는 가족을 초청했다가 항해도중 몽땅 익사, 참 스산한 삶을 살았다. 학문적 업적에 비하면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 이었다고나 할까?
후라니(Hourani)의 대명저라고 할 수 있는 900쪽짜리 <아랍인의 역사>란 책, 프롤로그 7쪽이 이븐 칼둔의 사상과 이론해설로 시작 하는것을 보면 대석학은 석학이다.

시간은 갑자기 멈춰 중세에 와 서 있다.
안내자 없이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Y자 갈림길들.
예배시간을 알리기위해 모스크에서 울려 나오는 아련한 아잔소리. 무거운 짐을 실어나르는 불쌍한 당나귀들. 그리고 길위의 그 똥들. 가죽제품 상점마다 풍겨나는 역겨운 가죽냄새는 아라비아 커피향과 박하향에 뒤썪이고. 낡고 비틀어진 문짝 그 어디메에는 알리바바 40인의 도적과 그떼거리들이 와서 아무리 눈썰미 좋게 표시를 해놓은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꾸불꾸불 낡은 계단을 올라 박핫닢 하나씩 받아들고 그 유명한 천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추와라(Chouwara) 무두질 공방을 내려다 보고섰다. 탈색을 위한 비둘기똥과 염소오줌 썪는 냄새는 속을 뒤집고 표백 웅덩이 옆에는 염색을 위한 파랑, 빨강, 노랑, 갈색통들이 수도없이 늘어 섰다. 무두질장이들 서너사람 누런 황토가 든 통속에 작업을 하는 시늉을 하는것 처럼 보였다.
라마단이 뭔지도 모르고 무가네로 불쑥 찾아든 우리가 잘못이지. 집 난간들에는 염색한 양가죽들이 널려있고 깜짝 놀랄정도로 집 지붕들에는 파라볼라 안테나(Parabola Antenna)들이 울창하다. 그들은 중세에 서서 알라(Allah)를 찾는게 아니라 분명 21세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버스는 산허리를 돌아올라 메디나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올라섰다. 이제 파란 지붕의 카라위인 대학도 보인다. 그들의 데이트 장소라는 묘지도 옆에 있다. 올망졸망한 비석들은 하나같이 무함마드가 묻혔다는 메카를 향해섰다.

막 추수가 끝난 너른 들판들. 그들에게는 저 아틀라스 산넘어 로렌스가 달리고 프랑스 외인부대가 놀던 사하라도 있고.
나는 마그레브가 옛유럽을 가르쳐주던 영화를 다시 찿기위해 이제 잠에서 깨어나려면 그들의 박정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Maroc의 수도 라바트(Rabat)에 들어섰다.
이곳도 근 2300여년이나 된 고도(古都). 로마인들이 200여년 지배하다가 서기 250년부터
베르베르인이 통치 하기도 하고 12-13세기에는 이슬람의 근본주의파인 알 모하드(Al-mohad 1145-1232)朝가 있었던 땅이었다. 라바트란 뜻은 ‘승리의 근거지’란 말인데 1146년에 여기서 스페인을 향해 출병했던 역사적 장소다.

이슬람의 스페인 지배는 800년간. 첫 출병이 711년 베르베르족 노예출신인 타리크(Tarik)장군 지휘로 이루어 졌는데 지브롤터는 이 타리크장군 이름에서 따온 지명(地名). ‘탈리크의 산’이란 뜻이다. 그 다음이 1090년 알 모라비드(Al-moravid, 아랍어 Al-Murabitun을 스페인식으로 표기하면 알 모라비드가 된다)朝의 군사들이 갔는데 이는 베르베르족 왕조 이다. 뒤이어 알 모하드朝가 56년뒤인 1146년에 라바트에서 출병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스르(1232-1492)朝가 갔고.

그러니까 무슬림들의 800년 스페인지배는 한왕조가 수미일관되게 통치 한것이 아니다.
안달루스는 우마이야 에미르 세력권(756-929)에 놓이기도 하고 우마이야 칼리프 시대(929-1031)를 거쳐 도시정도의 소왕국인 타이파연합시대가 오는데 이 우마이야朝 후기의 문화가 유럽 전체에서도 보기드문 전성기이다. 꼬르도바 하나만 봐도 인구가 50만, 300개의 목욕탕과 300개의 모스크와 50개의 큰병원들을 자랑했다. 수준높은 공공 및 개인 도서관들은 나머지 유럽전체보다 더 많은 장서를 자랑을 했다니 그 영화를 짐작 할 수가 있다.
그것을 처다보던 이 마그레브에 있던 이슬람 근본세력들은 시정한다는 명분과 약탈을 목적으로 스페인으로 군대를 연이어 출병한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출병을 할 때마다 점점 더 근본주의적이어서 다양하고 관용적이고 창조적인 우마이야朝에 반감을 갖고 떠났는데 가서 문화를 경험한 뒤로는 부드러워지고 이해하게되어 오히려 혼용문화를 선도하며 앞장섰다고 이슬람사는 기록하고 있다.

라바트는 북아프리카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하다.
로마시대의 허물어진 성벽과 알 모하드왕조의 3대 모울레이 야곱(Yakub el Mansur)이 1190년에 시작, 짓다가만 하산탑이 남아있다. 그 옆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무함마드5세와 그 아들 하산2세 형제의 영묘가 호화롭게 새로 새워져 있었다. 무함마드5세는 오랜 망명생활 끝에 우프키르장군과 손을 잡고 Maroc의 독립을 되찾은 인물이고 아들 하산2세는 우프키르장군의 쿠테타 기도를 막고 다섯발의 총알로 벌집을 만들어 사막에 갖다가 묻은 군주이다.

성벽은 1755년 폴르투갈 대지진 여파로 허물어져 부분 부분 세월의 영고성쇠를 말하고 하산탑은 한변이 16m의 정사각형, 44m까지 올라가다가 3대왕 모울레이의 죽음으로 공사가 중단 된채 800여년을 서 있었다. 그 앞 넓은 뜰에는 1년 365일을 의미하는 기둥 365개가 높이를 제각각 달리해 세워놓았다. 아래 마당에서는 마침 국기하강식이 거행 되었는데 민심이나 사는 처지와는 동떨어진 왕정의 위세를 뽐내는 모습처럼 보여나는 속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모울레이 하산 거리와 무함마드5세 거리 코너를 다차지한 라바트왕궁도 참 지나치다는 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슨놈의 경비병은 군복색갈도 여러가지를 입고 그렇게 많이 섰는지. 가이드 말로는 흰색을 입은 군인들이 왕의 직속경호대로 파워가 가장 쎄다고 했다.




카사블랑카 도시 전경 / Casablanca, Maroc


차는 카사블랑카로 향했다.
영화 한편으로 영원히 우리들의 청춘에 각인되어있는 카사블랑카.
거기는 실망스럽게도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는 한번도 와보지도 않았던 땅이었고 영화에 짙게 깔려있는 안개라고는 도무지 구경도 못하는 곳이란다.
영화에 이름만 도용 당한 항구는 이젠 세월이 영화가 나온지 68년이나 흘러 인구 5백만을 껴안고 공해에 허덕이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영향인지 부촌 아파트들의 외관은 무척 팬시(Fancy)하고 우리가 묵었던 Hotel Casablanca는 추리한 몰골로 올드타운 골목에 서 있었다.

라마단에다가 이슬람들의 공휴일인 금요일밤. 호텔 맞은편에 있는 사원에서는 밤새도록 꾸란 외우는 소리가 요란, 아내는 잠 한잠 못잤다고 불평을 했다. 나는 탕헤르를 떠나 페스, 라바트를 거친 장거리 드라이브로 잠에 골아 떨어졌고.

그러나 카사블랑카에 와서 영화 <카사블랑카>가 이 도시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작품이라고 해서 입을 싸 봉하고 떠날 수는 없다.
더구나 영화의 주제가 내게서 떠나버린 여인을 도와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니 심각해지지 않을수가 없다. 만약 릭이 잃었던 사랑을 되찾아 일자를 다시 껴안았다면 우리 모두 이영화를 외면했을터이다.
릭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 미친세상, 세 사람이 동시에 행복해질 수는 없는법”이라며 일자를 떠나보낸다. 일자의 남편 빅터 라즐로를 체포하기위해 일부러 나치가 급파한 독일군 슈트라세소령을 쏴죽여 가며.

참 이만큼 탄탄한 이바구도 보기 드문데 제작 당시에는 시나리오도 완성되지 않은채 촬영에 들어가 숱한 일화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험프리 보가트가 대사에도 없는 소리를 지꺼려 다시 찍으려니 잉그리드 버그만이 다음 작품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 출연을 위해 머리를 자른뒤라 어쩔 수 없었고 배역도 애초에는 로날드 레이건과 미셸 모르강이었는데 출연료가 너무높아 바뀌었다든가, 험프리 보가트가 키가 잉그리드 버그만에 비해 너무작아 상자를 놓고 촬영을 했다는 등... 가수도 원래는 당시 인기 최절정에 던 엘라 피츠제랄드를 쓸 예정이었는데 그가 너무 바빠 땜방으로 나온게 둘리 윌슨이고. 마침 일본의 진주만공습 직후 나온 영화이기에 인기는 하늘을 뚫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 이어 이 <카사블랑카>를 두 번째의 명화로 꼽는지 모른다.
카사블랑카를 떠나는 날 아침, 우리는 무함마드 5세 광장부터 먼저 들렸다. 여기가 카사블랑카 번화가의 출발점이고 광장 맞은편에는 짜가 ‘릭스 카페 아메리카’를 1층에 재현해 놓았다는 Hotel Hyatt Regency Casablanca도 보였다.

1996년에 6천만불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하산 메스지드(Masjid) 앞에서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많은 걸인들을 못본채하고 온천지에 왕궁을 깔아놓고도 그것도 모자라 이넓은 국토를 두고 바다까지 메워가며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이런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지. 글쎄 몇세기 지나면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기능할런지는 몰라도. 무슬림들은 왕권을 잡으면 그렇게도 세계 제일의 예배소를 갖고 싶은건가? 규모는 엄청났다. 탑높이는 메카의 예언자의 모스크를 능가할 수 없어서 200m로 제한했다는데도 가마득했다. 가까이서는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는다. 밤이면 색색 빔을 쏘아 호화찬란하고 한꺼번에 2,500명이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단다. 학교 도서관 목욕탕등을 다 갖추었고.

탕헤르로 다시 돌아서는 길, 버스밖 들판에는 콜크나무들이 껍질을 벗기우고 앙상한 나신으로 울고 있었다.
참 인간의 잔인성은 끝이 없었다.쾌속정 페리는 우리를 싣고 다시 스페인 타리파항으로 순항했다.
바다는 잔잔했고 Maroc으로 들어갈 때 처럼 비자 때문에 줄서서 기다려야할 일도 없으니 나는 지중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

Sep 30, 2010

안양서 씨야



Out of Africa(Main Tilte) - John Barry


 


 

  • ?
    이현순 2010.10.08 01:20
    잘 읽었습니다. 이 지역의 고대사는 깜깜하여 두번읽어도 역시 정리가 안되는 이머리는 IQ 두자리 인가 봅니다.
    아프리카는 발도 못디딘 이몸은 부럽기만 하고, 저라면 탕헤르에서 지브롤터를 건너 바라보는 이베리아 반도가 많이 좋았을 거에요.
    멕시코에서 받은 인상이 워낙 강해서 스페인을 꼭 가보고 싶은데, 비슷비슷한 동네를 느낄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 ?
    김창현 2010.10.09 09:58
    지리학을 전공하신 이현순씨 같으면 아틀라스 산넘어 사하라로 가셨을 텐데
    저는 번개불에 콩꾸어 먹듯 겉만 슬쩍 처다보고 돌아서는 발길 이었습니다만
    소위 그 아브라함의 자식들이라고 자처하는 유대교 기독교 회교가 어떻게
    서로 손잡고 혹은 다투었나를 유심히 더듬어 볼려고 나선 발길 이었습니다.

    돌아와 제가 생각한것은 이슬람 문명은 유럽문명과 다른 문명에 속하지 않고
    유럽문명의 본질에 용트림 치고 들어앉아 있지않나 하는 의혹만 커졌습니다.
    물론 Europe과 Arab이란 단어가 고대 셈어의 Ereb에서 파생되어 나온 같은 어원
    이라 하는소리가 아니고 너무 기독교적 시각에 빠져 평형감각을 잃고 살았다는
    자성에서 하는 소리 입니다.

    영국이 기독교를 믿기 6백년전에 아랍인들은 이미 기독교를 믿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 하는지. 또 꾸란에 (30대에 읽은 거라 기억을 아물 아물합니다만)
    예언자 무함마드는 기독교 비잔틴군대가 페르시아인들에게 패한걸 왜 그렇게
    안타가워 했는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2세는 뭔 필요에 의해 그렇게
    아랍어를 유창하게 지꺼렸는지. 기독교 전통의 아버지라고 일컬어 지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튀니지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사상을 형성해
    가며 살던 도시가 분명 터키인데 서구는 마치 자기들과 생을 함께한 유럽인
    으로 감추지 않았는지.......

    이제 우리도 마록을 Morocco라고 쓰며 살던 촌스러운 짓은 그만둘때가 되었다는게
    제 개똥 철학이 되고만 여정 이었습니다.
  • ?
    이현순 2010.10.09 15:21
    씨야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머리를 스치는게 유럽문화 내지는 남미의 문화까지 뿌리를 찾으면 전부
    아랍에 근원을 두었고, 우랄산맥 동쪽의 아시아문화는 몽고에 뿌리를 둔게 아닐까요.
    이런 현상은 인류의 이동경로와 맥을 같이 한것 아닐까요? 지금의 국가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북미는 인디언문화(동양적인)가 영국의 인디언 말살정책으로 없어지고 앵글로색슨의 문화지역을 형성한듯????----
    그냥 생각 해 보았습니다. 씨야의 해박한 지식으로 한번 쯤 정리해봐 주셔요.
  • ?
    김혜숙 2010.10.10 06:27
    Maroc기행문을 읽고 느낀것이 많습니다. 우선 역사에 너무 무식한 것이 한이 되지요.
    북부 Europe에 비해 Spain, Portugal, 그리고 특히 북부 아프리카의 Algeria, Maroc, Tunisia의
    문화적인 역사는 읽으면 읽을 수록 머리 아프게 복잡하군요.
    그래도 창현씨 덕분에 자극 받아 역사적인 준비 많이 하고 스페인 여행 떠나게 되었습니다. 감사 또 감사!
  • ?
    김창현 2010.10.11 05:33
    Espana나 Maroc의 역사, 지배민족은 엄청 복잡한게 사실 입디다.
    아랍계 피가 썪여 스페인 사람들이 그렇게 미남이 많다고 합디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인들과 무슬림을
    박해하고 부터 스페인은 폐쇄로 치닫고 몰락해 갔다고 봐야 겠지요.
    여행 잘 하시고 霧城 특유의 감성적인 글 기대 하겠습니다.
  • ?
    Faith_New_ 2012.07.02 17:56
    I always wondered if the Manchurian Candidate
  • ?
    Alyssa_Ver 2012.07.02 21:29
    I always wondered if the Manchurian Candidate
  • ?
    Julia_Geor 2012.07.02 23:11
    It makes sense about not continuing with "business as us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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