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시게노리(박무덕)

조선 도공의 후예로 일제의 외상이던 박무덕

사쓰마의 17대 번주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는 1592년 1만 5천명의 왜군을 이끌고 조선침략에 나선다. 들린 화승총은 1천 5백자루였다. 10명에 1정 꼴로 쥐어진 것이다. 그래서 시마쓰 부대는 소위 `화승총부대'라고 호칭되었다. 우리 남원성은 그들의 화승총 앞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조총(鳥銃)은 화승총의 별명으로 `나는 새도 쏘아 떨어뜨린다'는 데서온 말이다. 시마쓰는 그 전쟁 중 조선의 호랑이 씨도 말려 버린다. 그의 이 무용담은 이후 사쓰마 번의 어린이 교육용 교재로 쓰인다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교육이었다.

시마쓰 부대는 왜란 중 3차에 걸쳐 조선에 건너오는데 그중 1598년에는 약 80명의 조선인을 포로로 해 그의 번 가고시마로 끌고 간다. 물론 그들은 지금도 `데려왔다'고 쓰고 있다. 그중 40여명이 서쪽 바닷가 쿠시키노(관목야, 串木野) 쪽의 땅을 밟았다. 현재의 쿠시키노 시이다. 그 일행 중에 심당길(沈當吉)과 박평의(朴平意)가 있었다. 그들은 전라북도 남원성(南原城)에서 시마쓰 요시히로에게 잡혔던 것이다.

나와시로가와에서 1882년 12월 박무덕이라는 임진왜란 당시의 시마쓰 부대에 연행되어일본에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예가 태어났다. 그는 후에 두 번에 걸쳐 일본 외상이 되는 도고 시게노리(동향무덕,東鄕武德, 1882-1950)였다. 박무덕 즉, 도고 시게노리는 박평의의 자손이었다.

박평의는 심수관과 함께 백토를 발견하고 오늘의 사쓰마 야키를 연 사람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박평의의 후손 중 박수승(朴壽勝)이 있었다. 그가 박무덕의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토메'였다. 박무덕은 그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무덕이란 이름은 1886년까지 쓰여졌다. 네 살까지였던 셈이다.

그즈음 아버지는 옛 사쓰마 번사였던 도고 야하치로(東鄕彌八郞)에게 입적했다.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이제 박무덕은 동향무덕이 되었다. 박무덕은 가고시마 현에서 학교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는 1908년 8월에는 도쿄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 여섯명의 졸업생 중 한 명이었다. 석차는 `꼴등’이었다고 한다.
박무덕은 1910년 조국 조선이 일본에 합병 당하는 꼴을 보며 자랐다. 대학을 졸업 후 메이지 대학 독일어 강사를 했으나 방향을 바꾸어 외교관이 되기로 한다. 그에게는 조선의 피가 계속 따라 붙고 있어 행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박무덕 집안은 다이쇼(大正) 시대에 본적과 주소를 나와시로가와에서 동쪽 가고시마 시내로 옮기고 집도 옮겼다. 이것이 세번째 이사였다.
그는 1912년 외교관과 영사관 시험에 합격, 1913년 외무성에 들어가 중국의 봉천(奉天, 지금의 瀋陽), 스위스 등지에 근무했으며, 1919년에는 독일 베를린에 부임한다. 1925년에는 외무성 소련 담당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1년 10월에는 도죠 히데키 내각의 외상이 된다. 전쟁을 일으킨 내각의 외상이었다.

그는 나와시로가와의 `빛나는 별'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1945년 4월에는 스스키(鈴木貫太郞) 내각의 외상이 되어 일본의 종전 공작에도 뛰어 든다. 어쨌든 두 번이나 외상이 되었던 것이다. 박무덕의 생가는 시모이슈우인(下伊集院) 마을의 학교장의 숙사로 쓰였다. 이사하며 마을에 기부했을 것이다. 이 생가가 복원되어 ` 외상 도고 시게노리의 기념관'이 되었다.

도고 시게노리는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도조 내각의 일원이었기에

전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앞줄 군복차림이 도조 히데키, 가운데 원내가 시게노리.

박무덕의 부인은 `에디타 데 라란데'란 독일인이었다. 에디 부인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도고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그녀는 1887년 하노버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에 가서 살았는데 1902년 아버지가 이사가 되어 일본 코베(神戶)로 전근해 왔기에 그녀는 일본으로 왔다. 그녀는 17세 때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독일인 청년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 1872-1914)를 만나게 된 것이다.
데 라란데는 1903년 일본으로 건너 왔다. 그녀 가족보다 1년 늦게 일본에 온 것이다. 그녀는 데 라란데보다는 열다섯 살 아래였다. 그들은 결혼했고 그녀는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데 라란데는 서울에 세워지는 조선총독부 청사의 설계를 자문하고 있던 중 그 청사가 착공(1916)되기 2년 전인 1914년 서울에서 쓰러져 8월 4일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죽고 말았다. 데 라란데 나이 42세였다. 그의 장녀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에디타는 불과 27세에 미망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에 묻고 다섯의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을 떠났다. 데 라란데의 고향 베를린 근교 히르쉬베르크(Hirschberg)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영어와 불어 선생으로 지내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즈음 도고는 1919년 베를린의 일본 대사관 3등 서기관이 되어 독일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나치 히틀러 하의 베를린이었다. 그는 `위대한 조국, 위대한 총통'이란 말이 횡행하던 베를린의 한 복판에서 독일과 일본의 연락병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대사관은 독일 정부에 도고의 비서 겸 통역을 할 여성을 추천 의뢰했다. 이때 나치 정부에 의해 추천된 여인이 미망인 에디타였다. 에디타는 베를린으로 왔다. 도고와 에디타는 이때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독문과를 나온 도고는 독어에 능통한 외교관이었고 에디타는 일본어에 능숙했다. 둘의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업무 중에 연애 감정이 싹텄다. 연애는 급속도로 무르익었다.
에디타는 34세 때인 1921년 가을 도고와 재혼하게 되었다. 즉, 사내결혼이었다. 아이 다섯을 둔 미망인과 총각의 결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절한 결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고의 아버지 박수승은 1932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고가 외무성 구미국장(歐美局長)이 된 것이 1933년이니 그 1년 전이다.

그는 1934년에는 구아국장(歐亞局長)이 된다. 이후 독일 대사(1937), 소련대사(1938)로 승승장구 일본 외교의 리더가 되었다. 
도죠 내각이 성립하자 외무대신이 되어 일본 외교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의 일은 전쟁외교 수행이었으나 그는 화평파였다. 1942년 도죠 수상의 대동아성 설치에 반대, 사직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스스키 내각에서 다시 외무대신에 임명된다. 외무 대신을 두 번이나 하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은 패전했고 외상을 지낸 도고, 즉 박무덕은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재판에 넘겨지게 된다.

그리고 금고 20년의 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스가모(소압, 巢鴨) 감옥에 구금 중 병세가 심해져 1950년 5월 23일 쓰키지(筑地)의 도쿄병원에 이송돼 7월 사망했다. 67세였다. 그리고 그는 대중으로부터 잊혀졌다. 그리고 일본의 정사(正史)에서도 버림받는다. 아마 역시 조선의 피가 흐른다 하여 더 빨리 잊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A급 전범으로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에디타 부인은 1967년 죽어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도고가(東鄕家)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자식들은 이후 유럽에 남았고 커서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흩어졌다.

도고는 일본 편에 서서 전쟁외교를 수행했다. 우리의 반대 편이다. 그에게 고통받는 조선의 처지는 관심권 밖이었을 것이다. 그는 역시 일본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그는 한국인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역사의 비극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