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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2 00:19

겸제 정선

조회 수 69 추천 수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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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1676 ~ 1759);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겸재(謙齋). 호조참판에 추증된 시익(時翊)의 맏아들로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해 몹시 가난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남과 사귐에 결코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 점잖은 군자적 풍모를 지녔다.

어려서 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청하여 그의 권고와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주부·하양현감·청하현감· 훈련도감낭청·양천현령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화명을 통해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했으며, 이병연(李秉淵)·조영석(趙榮?)·유척기(兪拓基) 등의 노론계 인사들과는 백악산(白岳山:북악산) 밑에 이웃해 살면서 평생지기로 절친하게 지냈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친자연적(親自然的) 초속의식(超俗意識)과 풍류의식에 기초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정형산수와 산수인물 및 진경산수화가 대종을 이루는데, 특히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는 현실감 넘치는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하고 성행시킴으로서 한국적 회화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전국의 명승지를 탐승하면서 우리의 국토미와 그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이 닳도록 사생을 하며 동국진경(東國眞景)을 대성시킨 그는 자기집 주변의 서울 사철경관과 명승·명소를 비롯하여 금강산과 지방 수령으로 재임했던 지역 주변의 풍경들을 즐겨 그렸다. 인왕산과 백악산 등의 바위를 표현하기 위해 넓적한 붓으로 짙은 먹을 여러 번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개발하고, 금강산의 개골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한 각필(角筆)의 수직준(垂直?)을 창안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수묵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음양의 원리에 융합시킨 독특한 필묵법과 함께 대상의 특색 포착을 통한 인상주의적 감각에 의해 형성된 강렬한 바위주름법과 편필(便筆)의 소나무 묘법, 부감법의 대각선 구도 등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법을 창출함으로서 중국 산수화풍의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한국회화사에 일대 변화를 주었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의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은 실경사생의 모범이 되어 당대화가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장시흥(張始興)·정충엽(鄭忠燁)·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錫臣) 등으로 정선파라 불린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호암미술관)를 비롯하여 〈청풍계도 淸風溪圖〉·〈인곡유거도 仁谷幽居圖〉·〈경교명승첩 京橋名勝帖〉·〈해악전신첩 海岳傳神帖〉(간송미술관)·〈정양사도 正陽寺圖〉(국립중앙박물관)·〈만폭동도 萬瀑洞圖〉(서울대학교 박물관)·〈육상묘도〉·〈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