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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1 11:53

성춘향과 암행어사

조회 수 68 추천 수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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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향과 암행어사





오랜만에 춘향골 남원을 찾았습니다. 지난주 남원시청의 요구로 공직자들에게 청렴에 대한 다산의 이야기를 전해주러 갔습니다.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인연으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몇 분들이 식당까지 정해놓고 함께 식사를 하는 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춘향촌이자 한옥촌인 관광지에 있는 ‘춘향가(家)’ 라는 여관에 숙소까지 안내해주는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시청의 대강당에서 남원의 옛이야기 ‘춘향전’에 대한 이야기와 곁들여 다산의『목민심서』에 나오는 공직자들의 청렴 이야기를 했습니다. ‘춘향전’과 청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어사시(御史詩)가 떠올랐습니다.

    금술동이 귀한 술은 천 사람의 피인데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네
    촛불이 촛물 떨굴 때 백성들 눈물 흘리고
    노랫소리 울려 퍼지면 원망의 소리 하늘 찌르네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춘향전의 작자와 저작 연대는 미상으로 남아있으나, 대체로 영·정조 시대일거라고 추측합니다. 18세기 말에 파리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무대에 올려졌을 때, 조선의 남원에서는 ‘춘향전’이 판소리로 울려 퍼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이 귀족과 하층민의 결혼으로 신분변동이 일어나는 사회를 조명했던 것처럼, 춘향전도 양반 이몽룡과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이 결혼하는 신분변동의 양상을 조명해주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안입니다.

모차르트가 17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작품은 그 이전에 창작되었고, 그때 다산은 30세의 젊은 나이로 한창 벼슬하던 시기였습니다. 영조 말엽에서 정조 초년 경에 춘향전이 창작되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탐관오리들의 탐학질이 극도에 달하여 관과 민의 갈등이 최고조의 수준이었음은 다산의 시나 글에도 넉넉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오직 거둬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육성할 바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아랫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양육한다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목민심서 서문)”

다산의 이야기가 바로, 천 사람의 피[千人血]와 만백성의 기름[萬姓膏]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남원시청 공무원들에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암행어사가 바르게 지적했던 대로 탐관오리와 자신만 살찌우는 공직자가 안 되려면 반드시 청렴한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원에서 발상한 암행어사시를 늘 암송하면서 행여라도 그런 비난을 받을 공직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는 이야기로 강연을 마쳤습니다.

다산은 “세상은 부패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天下腐已久)”라고 개탄하면서 『목민심서』를 저작하여 청렴한 공직자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습니다. 모처럼 찾은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가 꽃피웠던 남원에 가서, 공무원들에게 칭찬보다는 꾸중만 더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춘향의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의 세상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ㅡ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