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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여인 - 루벤스 (Peter Paul Rubens) 작품

 

  노인과 여인 
 

  처음에

  위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이 떠오르세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여졌다고 상상하셨나요?

  불륜!  패륜! 의 현장이라고 짐작하셨나요?

  아니면 필히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이 그림의 제목은

  - 노인과 여인

  - 젊은 여인과 노인,

  - 또는 젖을 먹는 노인

  - 또는 노인에게 젖을 물린 여인

  - 또는 아버지와 딸, 중 하나라고 해도 됩니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의 국립미술관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여기를 찾는 방문객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같이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연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감을 표출한다.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에 버젓이… 아이구 참...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푸른 수의를 입은 주책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은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은 정말 3류 포르노인가?                   

                  

                 *              *               *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싸운 독립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 노인은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자기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 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Oh, My Papa - Connie Francis


                          

어제 아침에는 대학교수로 있는 친구가 편견을 버리라며 글 하나를 보내주었습니다. 좋은 글이 있으면 부지런히 물어다 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내 입장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사를 재단한다고.

 

그래서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무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인식 부족과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가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는 것이 좋겠다고.

 

친구가 보내준 ‘편견’이라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몇 년 동안 필리핀에서 사업을 한 한국인이 있었다. 세 명의 동료와 한 집에서 살았는데,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를 두었다. 가정부는 청소와 요리를 해 주었고, 그녀가 해주는 일은 마음에 쏙 들었다. 한 가지만 빼고...

 

사업가와 그 동료들은 집에 있는 술병의 술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걸 눈치 채고는 가정부가 몰래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남은 술이 얼마나 되는지를 술병에다 표시를 해서 술이 줄어드는지를 확인했다. 분명히 술은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에 그들은 골프 모임을 마치고 좋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자기 전에 한잔 더 할 생각을 하다가 술병에서 술이 자꾸 줄어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취기가 좀 돈 상태라 그들은 가정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이 남은 병 안에 오줌을 눠서 채워 넣었다. 술 냄새는 변함이 없었다. 그걸 선반 위에 도로 갖다 놓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았다. 며칠이 지났는데 술병 속의 술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들은 가정부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정부에게 자기들 술을 마셨냐고 물으니까, 가정부가 대답했다.

 

“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음식 만들 때 썼는데요.”

 

친구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솔직하게 상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문제는 이야기 하지 않고 편견을 갖게 되면 이런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편견을 만들어내는 이유. 철학이야기
 

편견을 깨부수는 사람이 있고 편견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가 합리주의적이라면 후자는 권위주의적이다. 혹은 군중심리이거나.

 

그 둘보다 더 재밌는 건 편견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심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편견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쉽게 판단하기 위해서다. 환원주의적으로 인과관계를 만들어놓으면 다음부턴 어렵게 따져볼 필요 없이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 전체를 쉽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편견 자체가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억견. 독사. 단순하게 환원해서 생각해버리는 것. 즉 한마디로 생각하기 싫어서 잔머리를 굴리고 꼼수를 쓰는 거다. 소설의 교훈과 정반대다. 왜냐하면 소설은 사실은 항상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편견이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을 통해 판단하기 어렵거나 아예 판단불가능한 부분을 판단하는 것이다. 쉬운 것으로 어려운 것을 설명하려는 정신의 편법인 것이다.

 

편견을 경험주의적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과대평가다. 확률이나 통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부적절하게 무리하게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과학적이다. 사이비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성급한 일반화다.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 싫을 때, 사람들은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예를들어 어떤 가수가 노래를 잘하는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저 가수의 학벌, 외모, 국적, 인종, 출신 지역, 성격, 기질, 재산,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 노래 실력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편견은 생각하기 싫어서, 생각의 게으름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것을 판단할 때 본질을 가지고 생각해보기 귀찮아서 (혹은 그럴 능력이 없어서) 편견을 만들어내고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래 실력이나 음악적 본질을 판단할 때 그냥 그것 자체를 판단하면 되지 굳이 다른 껍데기를 기준으로 삼을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게으름이나 무능력 둘 중 하나다.

 

노래 실력이나 음악적 본질같은 것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 자체는 어떨 것인가. 사람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출신 지역이나 국적, 인종, 외모, 학벌로 판단한다는 것은 그사람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생각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다.

 

편견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쓰는 유용한 도구다. 편견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쉽게 판단하기 위해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뭔가를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도 판단하고 싶어한다. 그럴 때 필요한 쉽고 편리한 판단의 기준이 바로 편견인 것이다. 그것은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일일이 이해하기 귀찮은 게으름 때문일 수도 있다.

 

재밌는 것은 그렇게 편견을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는 약간의 생각을 필요로 하고 약간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무리하게 형성된 인과관계라고 해도 그것은 나름의 사고, 이론화를 요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만)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쓰레기통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편견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생각해는 고안물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복잡하고 수상한 것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해. 예를들면 찌질이 같은 개념이 그렇다. 그 개념이 너무 폭이 넓고 모호해서 수상한 것들은 대부분 거기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이병도 비슷한 케이스다.

 

쓰레기통 개념과 편견의 차이점은 쓰레기통 개념이 모호한 것들을 모호한 개념 속에 다 집어넣는 것과 달리 편견은 확실한 기준으로 모호한(적어도 자기자신에겐) 것들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편집증(과도한 이론화)은 편견을 만들어내는 심리와 결과면에선 비슷하지만 의도나 원인은 전혀 다르다. 편집증은 인과관계의 망상병인데 비해 편견을 만들어내는 심리는 병에 의해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생각하고 싶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의 차이는 결과 면에서도 나타난다. 편집증이 비-합리적이라면 편견은 유사-합리적이다. 즉 편집증은 누가 봐도 미친 것처럼 미신처럼 보이지만 편견은 그럴 듯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편견은 인과관계를 망상한 것이 아니라 사이비-유물론적으로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편집증엔 아무 근거도 없지만 편견엔 항상 그 나름의 (경험적, 이론적, 통계적, 확률적) 근거가 있다.

 

쉽게 판단하기,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기, 편의적으로 단순화하기. 이런 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일 수 있다. 편견은 어떤 사람들에겐 필요하다. 즉 자기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을 단순화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핀견의 심리엔 게으름보다도 무능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뛰어난 사람들은 수준이 높기 때문에 굳이 편견같은 것으로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세상을 단순화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합리적으로, 개념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썼던 글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론화라는 것도 과대평가다. 경험적 데이터 통계 확률만으로 만드는 것이 편견이다. 편견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론이 없다. 즉 왜 그런가가 없다. 그냥 살다보니 그렇더라 뭐 그런 얘기에 불과하다.

 

어떤 경향, 확률적으로 높은 분포, 그런 건 살다보면 확실히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경험적 통계만으로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나서 이제 앞으로는 그건 다 이렇다 식으로 판단해버리면 거기서 예외가 되는 사람들을 판단할 때는 확실히 오류가 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편견을 만드는 진짜 이유는 바로 저 예외들을 겨냥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즉 편견을 만드는 이유는 편하게 살기 위한 게으름이나 머리가 좋지 않은 무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외들을 다수에 통합하기. 싸잡아 묶어서 판단하기. 그것은 단순히 편리를 위한 것만은 아니고 예외들의 존재에 대한 증오, 악의에 의한 것이다.

 

그건 다 이렇다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건데 이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이고 사기고 가짜다 라는 말이다. 편견은 사실 이 용도로 쓸 때만이 의미가 있다. 편견은 맞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것의 존재 이유는 맞추는 것에 있지 않다. 그건 틀렸을 때야말로 진짜 존재이유를 부여받는다. 편견은 자신이 틀렸을 때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외를 다수에 낑겨넣으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예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물론 그 이유는 게으름이나 무능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특정 예외들에 대한 적의에서 편견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경험적 통계에 대한 예외의 존재 자체가 짜증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그 예외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편견이 나쁜 이유는 예외들이 소외되기 때문이다. 예외들은 억울한 상황에 처한다. 단순히 통계적 경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똑똑한 사람은 다 겸손하다 라는 편견이 있다면 오만하면서 똑똑한 사람은 이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예외를 인정받기 보다는 오히려 존재를 부정당한다. 편견은 이렇게 예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수에 통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저 살면서 자신의 경험적 데이터가 쌓여서 그걸 토대로 편견을 만들어내는 게으름과 무능력의 혼합으로 편견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예외들에 대한 증오에서, 혹은 특정 예외들에 대한 악의에서 편견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어 앞에서 말한 똑똑한 사람은 다 겸손하다 라는 편견은 어떤 오만하면서도 똑똑한 사람에 대한 적의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사람을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리하자면 편견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첫째로 통계를 먼저 쌓고 게으름이나 혹은 무능력으로 인해 세상을 편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예외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로 먼저 특정 예외에 대한 적의가 있어서 예외를 부정하기 위해 통계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예를들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개념은 통계가 먼저 만들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예외에 대한 증오가 먼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편견을 사용할 때 가장 많이 타겟이 되는 경우는 예외가 아니라 그 편견 안에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편견에 맞고 어떤 사람이 예외고를 판단할 기준이 편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편견은 그건 다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외가 존재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 예외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편견의 근본적인 문제는 맞고 틀리고를 판단할 기준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반증이 불가능하다.

 

편견이 공격의 의미에서 사용되어질 때 공격당하는 것은 그것에 해당되는 무엇이고 공격하는 것은 이렇다 라는 술어이다. 예를들어 흑인은 다 이렇다 라고 할 때 이 편견은 명백하게 흑인에 대한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모든 편견이 다 공격적이진 않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자기 수준으로 판단할 수 있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적 데이터를 통해 편견을 만드는 것이 편견을 만드는 주된 심리라고 한다면 그 편견을 특정 예외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심리가 본문 글에 나와있다면 후자의 심리는 좀 더 복잡하다. 이들은 어떤 가치에 대한 옹호를 위해 편견을 만들 수도 있고 (예를들면 겸손함. 겸손하지 않으면 똑똑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특정 예외에 대한 적의에 의해 편견을 만들 수도 있다. (예를들면 오만하면서 똑똑한 사람) 어쨌든 이들이 편견을 만드는 이유는 오만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에게 겸손을 강요하기 위해? 아니면 누군가의 오만을 단죄하기 위해? 어느 쪽이든 간에 이들이 편견을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세상을 편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똑똑함을 부정하기 위해? 똑똑한 사람은 다 겸손하다 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는 오만하기 때문에 똑똑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도 말했듯이 문제는 똑똑함은 그 자체로 판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편견을 만드는 사람들은 오만이나 겸손을 통해 똑똑함을 판단하려고 한다. 왜 그럴까. 그냥 똑똑함은 그 자체로 판단될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게으름이나 무능력일 수도 있지만 특별한 악의나 적의, 혹은 특정 가치에 대한 옹호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겸손을 옹호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오만을 단죄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똑똑함을 부정하기 위해. 똑똑한 사람은 다 겸손하다 라는 편견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편견의 존재 이유는 저것을 통해 이것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저것을 저것 자체로 판단하지 않고 이것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 거기에는 저것을 그 자체로 판단할 수 없는 무능력이나 판단하기 귀찮은 게으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가끔은 그 자체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다른 것을 통해 판단하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예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그런 의미에서 편견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세상을 이해하기 귀찮은 게으름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무능력에 의한 그동안의 경험적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판단하려는 악의없는 편견이고 둘째는 그 편견에 들어맞는 사람이든, 아니면 거기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든 특정 존재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편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