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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산문 (9) ● 가람의 수필 두 篇




가람문선 서(序) / 가람 李秉岐

고향에 돌아온 지 어언 여러 해가 된다. 흔히 항간에서는 낙향이라고들 말하지만, 낙향이 아니라 귀향이요, 귀거래(歸去來) 전의 심정에서 옛 보금자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새소리에 날이 밝아오고, 파도처럼 밀려 오는 송뢰(松籟)에 해가 저무는 속에 나는 오늘도 담담히 잔을 기울이다가 그만 하루해를 보내고 있다. 매화도 늙고 보면, 성근 가지에 한두 송이 꽃을 꾸며 족하듯이, 이제 나는 허울을 다 떨어버린 한 그루 고매(古梅)로 그저 무념무상이면 넉넉하다.

회고하면 모두 아득한 옛날, 내 주변을 지켜주고, 보살펴 주던 친구들의 소식은 이젠 저 산 너머 오고가는 한 점 구름처럼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지나가는 그림자요, 산골을 흘러내리는 물 위에 떠가는 꽃이파리들이다.

문득 헤아려 보면, 내 나이 일흔여섯 해 동안, 기구한 속에서 나날을 보냈고, 쌓아 놓은 학문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면괴스럽기 그지없는데도 이처럼 지기(知己)와 후배들의 알뜰한 정성이 결정하여 그 동안에 기록한 것들 중에서 골라 ‘문선(文選)’을 상재(上梓)하게 되니, 한편 내 옛 얼굴을 다시 대하는 듯도 하다. 다만 이 조촐한 용기에 담을 만한 것들이 못 됨을 한할 따름이요, 그에 따르는 향기가 또한 짙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따름이다.



풍란 (風蘭) / 가람 李秉岐


나는 난(蘭)을 기른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에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桂洞)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 작시(作詩)도 하고, 고서(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 해 여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또 6·25 전쟁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古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養士齋)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을 주었고, 고경선(高敬善)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 웅란(雄蘭), 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藿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 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었다. 방렬·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烟)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阮堂) 선생이 한묵연(翰墨緣)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계수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서도 가장 진귀(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도 없고, 난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廣闊)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 註 ① 미립 : 경험을 통하여 얻은 묘한 이치나 요령
   - 註 ② 촉랭 : 냉기에 접촉함
   - 註 ③ 방렬 : 향기가 몹시 풍기는
   - 註 ④ 안서 : 시인 김 억(金億)의 호
   - 註 ⑤ 청상 : 맑고 깨끗함
   - 註 ⑥ 看竹向須問主人: 대나무 향을 보아 모름지기 주인을 찾는다
   - 註 ⑦ 斗室蝸屋: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 아주 작고 초라한 집이라는 뜻
   - 註 ⑧ 三公: 삼정승



 가람 李秉岐 (1891~1969)


年 譜
    - 國文學者, 時調詩人, 隨筆家, 호는 嘉藍(가람) - 全北 益山 출신 - 한성사범학교 졸업 - 조선어학회 조직(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42)) - 일제 말기에「이태준」「정지용」등과 함께「문장」이란 문예지를 이끔 - 서울대 교수('46), 중앙대 교수, 전북대학장 歷任


    著 書
    -「國文學全史」(신구문화사, '57) -「國文學槪說」 (일지사, '61) -「가람 時調集」 (문장사, '39)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66) -「名時調鑑賞」(박영사, '58) -「이병기 詩選(난초)」(미래사, '91) -「恨中錄」외 古典註解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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