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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주칼럼]

 

                   그래도 사랑은 할 수 있다

 김선주  언론인

 
 
 
 
11월은 쓸쓸한 달이다. 연말이 가기 전에 한번 만나야지, 라는 연락이 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12월에 약속을 잡으려면 힘이 든다며 11월에 만나자고 재촉한다. 1년 내내 안부전화 한 번 없이 지내다가 기념일 챙기듯이 맞는 게 망년모임이다. 1년에 한 번 망년회 때 만나는 게 친구인가 하다가도 그것도 안 하면 살았달 게 없다 싶어 부지런히 날짜를 맞춘다.
 

젊은이는 양의 기운을 가져서 나이가 드는 것이 신나지만 늙으면 음의 기운이 강해져서 나이 드는 것이 서글프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버티지만 숫자란 게 정확하기 그지없어서 누구나 숫자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들도 나이 먹는 것을 무서워한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취업 걱정 등 먹고사는 일이 고달파서 사랑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해 버리는 것 같다.


지난주, <한겨레 21>에서 공모한 ‘제1회 손바닥 문학상’의 최종심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본선에 올라온 22편의 글 가운데 단 한 편도 사랑 이야기는 없었다. 연말 기분에 신산하고 삭막했던 터라 진한 사랑 이야기 한 편이라도 건져 내 영혼이 양식을 얻길 기대했다. 인류 최대의, 인생 최대의 보편적인 관심사는 사랑이고, 문학이든 영화든 어떤 예술작품이든 사랑이 영감을 주는 시발점이 된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한창 피가 끓는 2, 30대의 응모자들이 사랑을 소재로 작품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실직의 공포, 구직의 어려움, 비정규직의 불안함이, 작품들의 주된 소재였다. 거대한 감옥 안에 갇혀 있어서 움치고 뛸 수조차 없이 실의와 좌절, 체념에 빠진 모습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그것이 현실이고 진심이고 가장 절절한 문제였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직업이 없어도 장래가 불투명해도 사랑은 할 수 있다. 사랑! 은 돈을 번 다음에 직업이 생긴 다음에 장래가 보장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밤을 새우기보다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면서, 취업공부를 하면서 불안하고 고단한 밤을 새우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 글은 개인적으론 한 사람의 자화상이고, 어떤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시대정신이, 그 불안감이 그대로 반영된 탓이라고 받아들였다.


폴란드 작가 마레크 흘라스코는 2차대전 이후 폐허가 된 바르샤바를 무대로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 <제8요일>을 썼다. 젊은이여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아무런 현실감 없이 다가오는, 가난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한다. 사랑을 나눌 벽이 있는 삼각형의 방이라도 찾기를 소원한다. 다시 일요일이 와도, 또다시 일요일이 와도 고단한 날이 계속된다. 그들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날은 달력에도 없는 제8요일이어야 하는가. 그가 이 소설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다.


내 한 몸도 가누기 어려운 현실에서 원나이트 스탠드가 편하다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누구하고 사랑을 할 수 있겠냐고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이 겨울에 이 시대의 고단한 젊은이들이 돈이 없어서, 직업이 없어서, 장래가 불투명해서, 딛고 있는 자리가 불안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 키가 작은 것도 ‘루저’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세상에서 비정규직으로 돌면서 ‘루저’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진짜 ‘루저’는 조건만을 찾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사랑밖엔 난 몰라’ 하고 사는 것도 곤란하지만 ‘사랑 따윈 난 몰라’ 하면서 사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젊은이들이여, 힘들지만 그래도 사랑은 할 수 있다.

 


Love Story,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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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중 2009.11.21 23:09
    허선배님, 좋은 글 잘 읽고 부고USA 가족들도 보시라고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 ?
    김창현 2009.11.22 06:23
    참 착한 얼굴 이네요.

    필자의 직업이 한겨레 논설주간(?).
    항상 잇발을 줄로 쌍크랗게 갈고
    이명박이나 조중동, 삼성, 현대 물어뜯는 글만 읽다가
    이런글도 쓸 심성의 여유가 있나 하고 놀랐습니다.

    저는 그녀의 글에서 DJ의 세례명이 토마스 무어 인줄 처음 들었고
    참말로 노벨상을 받을 만한 훌륭한 겨레의 사표인걸 처음 알았습니다.

    민주당 대권후보로 운위 될때의 정운찬은 그렇게 희망에 찬 얼굴 이었고
    총리 지명 말이 나오자 한마디로 그녀 입에서 <구려>하고 일갈하시며
    이명박의 맞춤총리라고 판별하시는 선견지명을 가슴 깊게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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