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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의 어부처럼 느리게 살고 싶다"

       

       


       

      “그게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어. 난 제임스 티론과 사랑에 빠졌고, 얼마동안은 꿈같이 행복했지.....” 마약에 취한 메리의 마지막 독백이 무대에 스며들고, 서서히 커튼이 드리워졌다.

      메리 역을 맡은 황정순의 손떨림과 호흡, 대사 하나 하나까지 생생히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이던 구자흥은 숨죽이며 ‘밤으로의 긴 여로’를 지켜봤다. 그 연극은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명동극장은! 그에게 일터이자 향수이자, 인생이었다. 그 명동극장이 34년만에 되살아났고, 그는 명동극장의 극장장이 되어 돌아왔다.

      지난 6월 5일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의 극장장 구자흥씨를 문영기의 독(獨)한 인터뷰에서 만났다.

       

      ◈ 김자경의 ‘라 트라비아타’, 최무룡의 ‘햄릿’


      명동극장은 우리나라 예술인들에게는 최초의 무대이자, 최고의 무대였다. 제대로 된 극장 하나 없던 50-60년대. 일제시대 본정통에 세워진 명치좌(明治座)로 시작한 명동극장은 거의 유일한 무대였다. 48년 김자경이 출연한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공연이 이뤄진 곳도 명동이었고, 당대의 최고 배우 최무룡이 타이틀 롤을 맡은 ‘햄릿’의 초연이 올려진 곳도 이곳 명동이었다.

      “극장다운 극장이 여기 하나 밖에 없으니까, 오페라가 됐던, 발레가 됐던, 무용이 됐던 좋은 단체들은 전부 여기를 선호했다. 연극만해도 일 년에 닷새밖에 안 빌려줬다. 아주 탁월한 극단이라고 해야 겨우 두 번 그러니까 열흘 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구자흥 극장장의 회고다.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명동극장, 즉 국립극장은 장충동에 새로운 극장이 생기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40대 후반의 중,장년층만해도 명동극장은 이렇게 기억된다.

      ‘명동 상업은행 부지, 1평당 1억원이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땅’

      우여곡절 끝에 은행에서 다시 투자신탁회사로 그리고 다시 명동극장으로 부활하기까지 34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명동 예술극장에는 장민호, 신구가 출연하는 ‘맹진사댁 경사’가 재개막 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 명동 상인들이 되살려 낸 명동예술극장


      명동은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의 문화와 상권의 중심지이다. 특히 예술인들에게 명동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가난한 문인과 예술인들은 할 일이 없어도 늘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뮤직타운, 7월다방, 1번지 다방에는 주머니 가난한 예술인들로 늘 넘쳐났고, 해가 뉘였 뉘였 넘어가면,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하던 대포집 은성이 가득 찼다.

      이런 명동에서 명동극장은 모태와 같다.

      명동극장을 되살려 놓은 것은 사실 명동의 상인들이다. 시민운동이 극장을 살려낸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94년인가.. 대한투자신탁이 이 극장을 허물고 신사옥을 짓겠다고 발표했는데, 그것이 명동상인들을 자극했다. 명동의 상징은 명동성당과 명동극장인데, 여기에 새 건물이 들어서면, 명동의 상징이 없어지는 거다. 이 건물은 민간이 사지 말고, 정부에서 사서 극장으로 쓰여져야 한다. 이런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거다.”

      명동 상가 번영회 김장환 회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마침 신사옥을 짓기로 한 회사가 부도로 넘어가면서 명동 극장 건물이 경매로 나왔다. 경매 감정가액만 840억원. 정부가 사들이기에는 턱없이 예산이 부족했다. 정부가 확보한 예산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4백억이었다.



      “지금은 있을 수 도 없는 일이고,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일이다. 전자입찰로 모두 바뀌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그때 명동 상인들이 선의의 담합을 했다. 김장환 회장을 중심으로 한 명동 상인들이 뭉쳐서 이 일대  부동산 중개사들을 설득하고, 입찰장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부동산투기꾼들이 접근을 못하게 해서 무려 여덟차례 유찰을 시켰다...”

      결국 4백억원으로 감정가액이 떨어진 명동극장은 2천 4년 정부에 낙찰됐다. 십년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리고 5년간의 공사 끝에 명동예술극장이 부활했다.


       
      ◈ 조영남, 이상벽을 만난 세시봉 DJ 시절

      구자흥 극장장 역시 명동에 추억을 갖고 있다.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여름 특집공연 5편을 빠짐없이 보던 구자흥은 서울대에 진학한 뒤에도 연극에 몰두했다. 그런데 ‘영어 발음 좋고, 목소리 좋은’ 사람이었던 구자흥은 우연치 않게 음악다방 세시봉의 DJ를 맡게 됐다. 서울대 한 학기 등록금이 6천원이던 시절, 그는 DJ를 하면서 한 달에 6천원을 벌었다.

      세시봉은 잘 알려진 대로 우리 가요, 특히 포크 음악인들의 산실이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양희은, 서유석 같이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이곳의 무대를 거쳐갔다. 조영남, 이상벽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조영남과는 학번이 동기였다. 내가 사회를 보고, 조영남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 같은 것을 진행했다. 그런데 어느날 홍대  밴드가 와서 공연을 하는데 한 사람이 너무 사회를 잘 보는 거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이상벽이었다. 나보다 훨씬 잘 보는 것 같아서, 그 자리 물려주고 나왔다.”

      군대 시절, 가수 조영남이 보내준 위문 편지를 받곤 했던 구자흥은 부대에서 ‘존경’받는 유명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첫발을 내딛은 곳은 당연히 연극 무대였다. 극작가 김의경씨가 운영하던 극단 실험극장에 배우도 아니고, 연출도 아닌 기획자로 발을 들여놓았다.

       

      ◈ 명동극장 유리창을 깨뜨린 연극 ‘햄릿’

      그가 연극판에 뛰어들었던 70년대 초반 연극의 기획파트는 유명무실했다. 그저 포스터 열심히 붙이고, 티켓 판매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는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획을 했다. 나름대로 과학적인 분석 끝에 가장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을 만들기로 하고, 마케팅까지 철저히 기획했다.

      무대에 올려진 작품은 햄릿. 주인공은 김동훈이었다. 그는 흥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후배 한명과 극장옆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이틀 밤을 꼬박 새며 8천2백장의 티켓에 일일이 일련번호를 매겼다. 820석의 명동 국립극장에 10회 공연을 모두 매진시키면 정확히 8천 2백장의 티켓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첫날부터 관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밀려든 관중을 통제하기조차 어려워, 명동극장 정문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으로 밥먹고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인쇄업을 병행하던 그에게 우연히 아모레 화장품으로 유명한 태평양화학에 입사할 기회가 생겼다.


      “딱 1년만 하자고 생각하고 입사를 했다. 사보 만드는 일을 한 1년 하고 사표를 내려니까 ‘향장’이라는 잡지만드는 일을 하라고 해서 다시 1년을 있었다.. "

      당시 아모레 화장품으로 유명한 태평양에서 만든 ‘향장’은 우리나라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출판물이었다. 백만부가량 발행된 ‘향장’은 영향력 또한 막강했다. 최근 ‘김남주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듯, ‘향장’의 표지 모델이 걸고 나온 귀걸이는 다음날로 모조품이 만들어졌고,
      립스틱 색깔을 바꾸면, 그 색깔의 립스틱은 날개 돗힌듯 팔려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직장생활은 광고회사로 이어지면서, ‘금성’(LG전자의 전신)과 ‘삼성’, ‘아모레’와 ‘피어리스’의 광고전쟁을 최일선에서 치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의정부와 안산 예술의 전당 관장과 정동 극장장을 거쳐 그는 명동으로 돌아왔다.
       

      ◈ 멕시코 어부와 연극

      명동예술극장은 연극 전문 제작극장을 표방하고 있다. 다른 단체에 극장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기획한 ‘정극’만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개관 프로그램인 ‘맹진사댁 경사’를 시작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으로의 긴 여로’, ‘베니스의 상인’이 차례로 공연된다. 34년만에 재탄생하는 만큼 기대도 크고, 그만큼 부담도 크다.


      또 최근의 화려한 볼거리 많은 대형 뮤지컬이나 연극과 비교하면 관객동원이 제대로 될 것인지 걱정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정극만 고집해서 장사가 되겠느냐는 약간 ‘초’치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엉뚱하게도 멕시코 어부의 얘기를 꺼냈다.

      “ 멕시코의 한적한 시골에서 어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미국인이 다가와 좀 더 많이 잡는 방법이 있을 텐데..했다. 어부가 물었다. 많이 잡아 뭐하게? 많이 잡으면 배도 사고.. 배를 사서 뭐하게? 배를 사면 고기를 더 많이 잡고.. 고기를 더 많이 잡으면 뭐하게? 그러면 좋은 곳에 집사서 편하게 살 수 있잖아.. 이봐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잖아.”

      그리고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연극에는 오락적인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연극은 영화처럼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이벤트다. 아주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연극은 산업화, 기계화가 되도 무대 매커니즘 외에는
      자동화가 불가능하다. 배우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지는 영원한 1차 산업인거다. 옛날에 TV가 나왔을 때 모두 연극이 죽을 거라고 했지만, 연극은 살아남았다.”

      연극 얘기가 나오자 그의 얘기가 길게 이어진다.


      “ 늘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만 찾는 관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멕시코의 어부처럼 느리게 살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소수일지라도 그 사람들을 위한 연극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연극을 민간이 하기 어려우니, 국가가 지원하는 거다. 연극은 우리 선배들도, 우리들도 앞으로도 먹고 살기 힘든 직업일 거다. 하지만 부모가 뜯어 말려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온다.”


      그리고 극장을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놀이터’로 생각한다는 그는, 말을 이렇게 맺었다.

      “ 연극이 엄청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안한다. 하지만 연극은 어렵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

      명동에서는 34년만에 이제 맹진사의 웃음소리에 이어 맥베드의 통곡소리, 창가에서 줄리엣을 부르는 로미오의 달콤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 여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이제 관객들의 몫이다.

      - CBS탐사보도팀 문영기 선임기자


      Faure's Elegy for cello & piano in c minor Op.24

      Jacqueline Du Pre, Cello / Gerald Moore,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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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식 2009.07.29 11:28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예전 국립극장이던 명동극장은 우리세대에겐 큰 추억거리의 하나라고 할것입니다.
    위 글엔 나오지 않았지만 이해랑 김동원 장민호 백성희 등을 주축으로한 극단 신협(新協)의 공연을 자주 가봤고
    저녁은 바로 앞의 한일관에서 냉면이나 불고기로 들곤 했는데 5층 모두를 쓰던 매머드식당 한일관도 명동의 상징이었지요.
    부고 7회 김의경 선배의 얘기도 나오는데 우리나라 연극사에선 빼놓을 수 없은 공로자의 한사람이라 할것입니다.
    극작가로 이름 날리다가 직접 연출에도 뛰어들어 실험극장을 거쳐 현대극장을 부인과 함께 운영하기도 했었지요.
    한 때 잘 나가던 현대극장 시절엔 혜화동에 큰 빌딩을 얻어 사무실 겸 연습장으로 썼는데 두어번 놀러가 본 기억이 납니다.
    구자흥 씨는 우리보다 몇살 아래지만 추억의 공감대가 있는 같은 세대이기에, 그의 명동 컴백이 반갑고 감동도 느껴지는군요.
    그 시절 낭만을 감미롭게 되살려주는 글, 고마워요 허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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