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열린게시판 > 열린게시판
 
조회 수 285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extra_vars1 |||||||||||||||||||||||||||||||||||||||
extra_vars2 |||||||||||||||||||||||||||||||||||||||||||||||||||||||||||||||||||||||||||||||||||||||||||||||||||




                                                                                                              ▲ 일러스트=잠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_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1979)




두 시인의 감상 글

◎ 이 시는 4.19 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노래한 4.19 세대의 만가(輓歌)이다. 김광규 시인은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를 4.19혁명 이후 18년만에 썼다. 중남미 보컬 그룹이 불러 196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던 노래의 동명의 제목이다.
터놓고 말하는 이 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듯 하다.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사람들의 살풍경, 온데간데없는 열망과 초심(初心), 터럭만큼의 부끄러움조차 없게 된 양심, 판치는 속물주의와 물질주의. 이것을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된 깊숙한 '늪'이라고 부른다. 크게 호통을 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고나면 뭉근하게 가슴이 저민다. 왜 그런가. (중략)
김광규 시인은 자신의 시는 오페라에 있어서의 레치타티보(서창)쯤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아리아처럼 목청을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낮게 중얼중얼거릴뿐, 하지만 이 중얼거림은 살기 바쁜,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배불리 먹는 일에 열중인 우리를 거북하게 만든다. 마치 맨발로 사금파리를 밟은듯 하게. 일례로 그는 우리를 '4월의 가로수'에 섬뜩하게 빗댄다. 우리의 모습이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4월의 가로수')있는 수양버들이라니! 그러나 둘러댈 말이 없다.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면 이 시를 다시 읽게 된다. 까슬까슬하게 카랑카랑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 시인 문태준


◎ 이 시는 4.19 세대인 시인이 1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때 친구들과의 세밑 모임에서 느낀 소회를 담고 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소시민적 삶과 비교하면서 자조하며 회한에 젖는다. 젊은 한 때 내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방향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내 꿈과 신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던 패기는 온데간데 없고, 이젠 다들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면서 안주하는 모습들을 스스로 보인다.
혁명을 품었던 열기는 '옛사랑'이 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으며, 오히려 지금은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그 ‘그림자’만 부끄럽게 추억할 뿐이다. 세월의 유수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성은 다 깎여버리고 맹목과 복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곧 개혁이고 진보인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살기위해 살고’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또 한 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기려 한다.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을 고개 떨군 채 수상히 지나치며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 시인 권순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_ 정시스터즈


Luna Liena(원곡) _ Trio Los Panchos



《esso》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685 老人들의 明心寶鑑 김직현 2012.04.11 400
10684 老人 十二道 김영원 2008.03.19 1251
10683 蘭香과 名言 김선옥 2013.04.22 190
10682 蘭皐 平生詩 (난고 평생시) 1 김선옥 2009.11.02 711
10681 落花 - 조지훈 김상각 2017.02.19 73
10680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흘러 내리는 물길이 ... Skylark(7) 2004.07.11 1214
10679 힘의 상징 파도 김선옥 2012.05.17 298
10678 힐링 캠프 : 박진영 편 / 못보신 분은 꼭 한번 보세요!! 한구름 2012.05.06 491
10677 히말라야의 노새 ... 박경리 안장훈 2012.11.30 320
10676 히말라야 14봉의 위용(威容) 1 김우식 2007.01.11 443
10675 히말라야 14봉의 위용(威容) 10 inkap choi 2007.01.12 6286
10674 희한하게 생긴 25종의 닭들 전수영 2013.03.02 199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_ 김광규 이태식 2013.04.19 285
10672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조진호 2002.12.30 1759
10671 희망찬 '청마(靑馬)'의 해 2014 갑오년 5 이태식 2014.01.30 163
10670 희망의 그림 명남진 2009.11.19 464
10669 희망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조동암 2011.09.28 334
10668 희망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축복 1 안장훈 2008.12.26 995
10667 희망 / 임어당 박사 김상각 2017.03.07 88
10666 희귀한 꽃 그리고 행복한 사람 김필수 2008.08.30 70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37 Next
/ 537